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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베어>와 정서적 자산에 관한 메모

love you Syd

by 않인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우리는 무엇까지를 상속받는가’: 영화 <머터리얼리스트>를 보며 뻗은 곁가지 질문 중 하나였다. 인간이 지닌 정서적 자산과 심리적 여유는 가정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경제적 자본, 사회적 계급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나 늘 그렇지는 않다. 꼭 경제적 자본과 비례하지는 않은, 정서적 자산(혹은 재난)에 관해 살피기 좋은 시리즈가 <더 베어>다. 작품은 전 시즌에 걸쳐 베어제토 형제자매들이 ‘상속받은’ 끔찍한 무형의 덩어리를 다룬다. 아수라장 스펙타클로 유명한 시즌2의 ‘Fork’ 에피소드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카미는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보거나 풀어내지 못했다. 전 직장의 상사에게서 지속적으로 겪은 언어적 폭력과 교묘한 가스라이팅은 거기 기름을 끼얹었을 것이다. 매번 후회하면서도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그를 이해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길바닥에서 싸우는 루시와 존을 보며 눈살을 찌푸릴 수만은 없었듯, 카미를 마냥 미워할 수는 없었다.

다행이랄지, 레스토랑 “더 베어”에는 시드니가 있다. 아직 그가 카미에게 고용돼 있던work for him 시즌1, 한 에피소드에서는 새로 도입한 시스템 문제로 감당하기 어려운 량의 주문이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상황이 발생한다. 카미의 공격적 비난을 마주한 시드니는 말없이 앞치마를 벗고 가게를 나간다. 무책임한 회피가 아닌 부당한 압박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행위다. 이후 시즌에서 시드니는 성숙하고 바람직한 리더이자 팀원으로서 ‘더 베어’에 존재한다. 위기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침착하게 대처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와중 문제를 해결하는 의사소통 방식을 취한다. 시드니에게 역시 불안과 조바심이 있다. 허나 그는 그걸 소화하고 표현할 줄 안다. 그 정서적 자산은 어느 정도, 물려받은 것이다. 성격이 유전됐다는 의미가 아닌, 아빠가 가정에서 보여준 태도와 말하기 방식을 학습했으리라는 뜻이다. 더불어, 무언갈 증명하지 않아도 영원한 내 편이 돼 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은 불안과 조바심을 내면에 농축시키지 않도록 도왔을 것이다. 시드니도 그의 아빠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카미와 그의 엄마 사이에 나쁜 기억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비교하고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은 생각보다 다양한 것을 ‘상속받는다’는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여지는 늘 있다. 고함을 기본 화법으로 쓰며 시드니를 대놓고 무시하던 리치가 시즌2, 3에 걸쳐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면 감격스럽다.

더 베어 패밀리 모두가 성장하고 변하는 동안, 카미의 마음은 어두운 동굴 속에 남아 있었을지 모른다. 그 그림자는 종종 흘러넘쳤다. 대뜸 언성을 높이는 등의 사건은 줄었어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스스로를 (거의 무의식적, 습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동료들을 몰아붙이는 일은 반복됐다. 그러므로 시즌4 마지막화 시드니와 카미, 리치가 나누는 대화는 비록 달갑지만은 않은 소식에서 비롯됐으나 그 의미가 크다. 사실 시즌1 무렵 이루어져야 했던 대화다. 한참 늦었고 여전히 무책임한 면이 있음에도 이는 굉장한 성장이다. 직전에 엄마의 집에 방문한 사건이 계기처럼 보이나, 그동안 겪은 일들과 사람들이 시나브로 영향을 미쳤을 테다. 알코올중독자 가족 익명 모임, 클레어와의 관계, 자신을 믿어주는 동료들-특히 시드니와의 일화들… 비로소 내면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처리할 수 있게 된 카미의 내일을 응원하고 싶다.

덧붙이면, “더 베어”라는 이름은 패밀리 네임 베어제토에서 따온 것이지만, 이제 ‘더 베어’라는 공간의 상징성은 카미가 이야기했듯 주방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직원들을 조율하는 시드니를 가리키게 되었다. 3화의 오프닝에는 이곳에서 홀로 요리하고 플레이팅하는 시드니의 모습이 몇 분에 걸쳐 이어진다. 흘러나오는 곡은 St. Vincent의 ‘Slow Disco’. 마지막화의 엔딩은 이 트랙의 다른 버전인 ‘Fast Slow Disco’가 장식한다. 레스토랑 ‘더 베어’와 시리즈 <더 베어>의 다음 시즌은 본격적으로 시드니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보다 성숙한 인물들의 달라진 역학과 리듬을 조명하리란 예고일까. 시즌3과 4가 1과 2에 비해 아쉬운 면을 나열하자면 할 수는 있으나, 내가 <더 베어>를 챙겨보는 중요한 까닭은 인물들의 고민과 분투를 깊이있게 다루는 와중 각자의 속도와 박자를 존중하는 작품이라서다. 이 점이 퇴색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구성이 덜 촘촘해졌다거나 사건에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하차하지는 않을 것 같다.


https://youtu.be/vOyRo-Yjr2Q?si=-IF8ZtXlOOhjdhnT

‘Fast Slow Disco’가 삽입된 시즌4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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