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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운 균열, 불완전한 복원

<양양>(2024, 양주연)

by 않인



오프닝은 홈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그런 줄 알았다)고 서술하는 감독의 내레이션이 포개진다. <양양>은 홈캠과 같은 개인적인 기록을 되감아 의도적으로 삭제된 내용을 복구하거나 담긴 것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다. 치밀한 계획이나 분명한 목표보단 모호한 궁금증과 감정이 추동한 질문에서 출발해, 그 ‘사적인’ 여정을 따라가는 동안 무엇이 발견되고 어디로 이어지는가에 주목한다. 양주연 감독은 대상과 밀접한 위치에 있는 관찰자로서 여성들의 삶을 기록하고 연결하는 작업을 해 온 다큐멘터리스트다. <내일의 노래>에서 그는 한예종 학부생 신분으로 한예종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그렸고, <옥상자국>에서는 5.18 광주항쟁의 목격자인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다. 이 계보를 잇는 <양양>에서 두드러지는 건 감독의 목소리 뿐 아니라 얼굴 또한 화면에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감독은 찍고 탐구하는 자인 동시에 찍히는 자다. 타인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찾아보는 모습은 사건의 전개나 조사의 진행을 드러내는 묘사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고모의 사망 사건에 관한 공식 자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의 얼굴에는 정리된 내레이션이 다 담지 못하는 정서가 비친다. 감독은 적극적으로 카메라 앞뒤를 오가며 반응하고, 과거의 잔상들을 꺼내어 관찰한다.

영화의 발단은 우연한 일화다. 감독은 어느날 술에 취한 부친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자신은 존재조차 몰랐던, 이십대 초반에 음독 자살을 했다는 고모 양지영. 감독은 그에 대해 알기 위해 가까운 이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지영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그의 삶을 되짚는다. 고인의 궤적은 동생(감독의 부친)의 기억에서 흑백사진으로, 중학교 친구들과 대학 동기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지영이 권위적인 부친과 불화했다는 점, 시와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 당찬 여성이었다는 점을 일러준다. 그 끝에 감독은 자살로 처리되었던 그의 죽음이 교제살인이었을 가능성을 의심하게 된다. 조각조각의 증언과 사진, 글들을 영화로 기록해 이음으로써 고인의 역사는 어느 정도 복원된다. 그러나 조작되었거나 사라진 공적 기록과 파편으로 남은 사적 기록 사이 간극은 메워지지 않는다. 또한 메워지지 않는 것은 상상의 유대와 현실 사이 간극이다. 고모에 관한 감독의 정서적 가닿음을 은유하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지영의 얼굴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는 감독을 비롯한 다른 여성들의 삶과 지영의 삶을 겹쳐보고, 동시대에 발생하는 교제살인 사건들을 그의 죽음과 나란히 둔다. 허나 실재했던 사람 ‘양지영’을 거대한 서사로 환원하거나 피해자로 단정하지는 않는다. <양양>은 숨겨졌던 개인의 삶을 사회의 맥락 안에서 발굴한다. 더불어 그 ‘사회’가 전체나 단일한 분류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수많은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상기한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복원하고 해석할 수 있는 과거는 극히 제한적임을 아는 영화, <양양>이 도달하려는 장소는 지영이 시집에 적은 메모의 클로즈업으로 표현된다.

결말부, 양주연 감독은 고모에 관해 알게 된 내용을 편지로 전달하며 아빠에게 가족 묘지를 이장하며 (원래는 없었던)고모의 이름을 비석에 새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수용되고, 화면에는 비석에 새겨진 지영의 이름, 그리고 주연의 이름이 비친다. 이는 두 사람이 전통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사건으로서가 아닌, 지워졌던 이름이 보이게 되는 사건으로서 의미가 있다. <양양>은 화목한 가정/행복한 가족의 그림에서 밀려났던 누군가를 그 안에 재편입시키는 것이 아닌, 그 그림 자체에 균열을 내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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