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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문자 메세지

음성인식의 최대수혜자

by 무늬

나른한 오후, 점심을 먹고 무거워진 몸을 의자에 구겨 넣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20분 전, 할머니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도마도 우유 커피 고기 머리 아플 때 먹는 약. 그러면 다했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드문드문해지는 기억력에 그녀는 나를 메모장 삼아 문자를 보내곤 했다. 지금쯤 할머니는 구루마(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홈플러스에서 장을 보고 있을 것이다. 잘 익은 토마토를 신중히 골라 담고, 정육점에서 가장 신선한 고기를 선별하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을 잃고 홀로 동생을 키워야 했던 할머니는 11살에 학교를 그만뒀다. 할머니는 글을 읽을 줄 알았으나 쓰는 일은 늘 주저했다. 혹여 자신이 쓴 글자가 틀릴까 두려웠던 걸까. 병원에서 검진표를 작성할 때에도, 핸드폰에 새로운 사람을 저장할 때에도 나를 찾았다.

그러나 이제 그녀도 첨단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문자키패드에 마이크 모양을 누르고 말을 하면 음성이 문자로 바뀌는 ‘음성인식’ 기술 덕분이었다.


소파 밑에 기대 앉아 '미스터 트롯' 삼매경에 빠진 할머니에게 핸드폰을 들고 다가갔다.

“할머니, 이거 보여? 길쭉하게 생긴 거. 마이크 모양이야. 이거 누르면 할머니 말이 그대로 나온다. 자, 봐 봐.”

할머니가 힐끔 보더니 손사레를 치며 티비로 고개를 돌렸다.

“싫어. 어려운 건 안 해.”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뾰로퉁하게 대답했다. 나는 싫다는 할머니를 살살 꼬셨다.

"한 번만 배우면 하나도 안 어려워. 전화 안 해도 이것만 누르면 문자 보낼 수 있다니까? 여기 눌러서 이렇게, 응?"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잠시 보더니 그녀는 못 이기는 척 핸드폰을 가져가 나를 따라했다. 자판이 튀어나온 것도 아닌데 애써 힘줘서 꾸욱 누르며 말했다.


“혜원아 안녕”

「행운아 안녕」


음성인식이 내 이름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가 빨리 말하면 잘 못 알아들어. 천천히 해야 돼. 지. 금. 어. 디. 야. 바. 로. 전. 화. 줘.” 나는 할머니가 자판을 누르듯 한 글자씩 꼭꼭 눌러 발음했다.


「지금 어디야? 전화 줘.」


이번에는 기특하게 문장부호까지 알아서 써줬다. 할머니가 관심을 보이며 핸드폰을 다시 가져갔다.

"우진이한테 문자 보내볼까?" 손자에게 직접 문자를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할머니는 음성인식 자판을 누르고 긴장한 목소리로 한 단어씩 천천히 말했다.


「우진아. 언제 와? 저녁 해 놓고 기다릴게.」


동생의 이름은 잘만 알아들었다. 두 번 만에 성공한 할머니의 입꼬리는 자신감으로 올라 가 있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말문이 트인 아이처럼 틈만 나면 문자 메세지를 보냈다.


「슈가면서 해 넘어 에스지 말고 좋은 하루 사랑한다」

틀린 줄 알면서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몰라 그대로 보냈을 서툰 맞춤법. 그 안에 담긴 진심 어린 애정을 가만히 매만졌다.


「Call mama. jonaro. harangue」

이번엔 애석하게도 한영버튼이 눌린 채로 전송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음성인식이 알아듣지 못한 할머니의 마음을 고쳐 읽었다.

‘고마워. 좋은 하루. 사랑해.’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 문자가 아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이 시간에 전화를 하셨을까. 다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오늘은' 별 일 아니라고 하셨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하셨단다. 고령의 할머니가, 점점 아픈 곳이 늘어나는 할머니가 나는 매일매일 불안하다.

이른 아침,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선다. 현관에서 신발 신는 소리가 들리자 할머니는 아침 밥을 준비하다 말고 버선발로 뛰어나온다. “좋은 하루.” 활기 찬 목소리로 손녀 딸을 배웅한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할머니는 계속해서 손을 흔든다. 문틈새로 할머니의 모습이 점점 사라진다. 집에서 멀어지는 발걸음이 무겁다. 방금 본 할머니의 얼굴이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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