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햄스터로소이다 - 4

4. 대탈주

by 흰코뿔소

(Illustration by KWY)

아악XX


귀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인간은 크게 팔을 휘둘렀다. 역겨운 피 맛에 금방이라도 욕지기가 치밀어오를 것만 같았으나,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앞니를 더욱 더 세게 박아넣었다. 어떠냐, 요놈아, 작다고 함부로 굴다가 큰 코 제대로 다쳤지?


아이고아야야아야


인간은 애처롭게 앓는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날뛰었다. 덩치가 산만한 놈이 체면이라곤 없군, 하고 나는 속으로 낄낄거렸다. 속으로만 웃었어야 하는데, 주둥이에도 미소가 슬며시 번졌나 보다. 살짝 힘이 빠진 사이, 나는 어느덧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이런 젠장.


햄스터는 날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날아야 할 이유도 없다. 날 필요가 있었더라면 조물주가 진작 날개를 달아 주었으리라.


그러나 기약 없는 추락에 애써 저항하면서, 나는 햄스터에게도 날개가 달려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콩, 미끌, 딱콩, 철푸덕.


휙 하고 날아가 벽에 세차게 부딪친 다음 천천히 미끄러져 바닥을 향하고 있노라니 그야말로 혼이 온통 날아갈 지경이었지만, 넋놓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나는 숨을 곳을 찾았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어두컴컴한 인간의 굴은 정리를 잘 하지 않는지 이리저리 어지러웠다. 숨을 곳은 많겠군, 벼락처럼 쪼르르 뛰어 나는 나무로 된 네모난 상자 아래로 바둥바둥 기어들어갔다.


XXXX 약 약 피 피 아 따가워


작은 심장이 털가죽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뛰었다. 금방이라도 저 손아귀가 어둠을 헤집고 쑥 들어와 꿈틀거릴 것만 같았다. 안 돼, 안 돼, 진정하자, 진정해, 지금 놓아 버린다면 걷잡을 수 없어. 다행스럽게도 방정맞은 발걸음으로 인간은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알싸한 약초 비슷한 냄새와 함께 피비린내가 멎었다.


어휴뭐야이제보니큰상처도아녔네


흥, 큰 상처가 아니긴. 살점을 내가 얼마나 뜯어냈는데. 손끝이 당분간 시큰시큰거릴거다.


혀끝에서 맴도는 핏방울을 뱉어내고 수염도 깔끔히 가다듬고 나니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좋아, 빠져나왔다. 다친 곳도 없이 무사하다. 등짝이 좀 뻐근하긴 하지만 큰 타격은 입지 않았으니. 숨기도 제대로 숨었으니 당분간은 쉬이 찾지 못할 터이다. 이제 동족들을 구해서, 아니, 그 전에 우선 식량부터 구해야 하나? 물은 또 어디서 구하지? 아냐, 천천히 생각하자, 동족들을 구해서, 사막으로, 사막은 그런데 어디쯤에 있나, 그 가게에 있던 동족들도 구해야 하는데, 우선 이 인간의 굴에서는 어떻게 탈출한담, 방향은, 거리는 또 어떻게 재야 하지?


문득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눈가가 시큰시큰거리더니 뜨거워졌다. 아직, 아직이다. 목구멍으로 불덩이를 삼켜 넘기고는 분연히 나는 일어났다. 위대한 햄스터 가문의 일원으로 이건 조상께서 내게 내리신 사명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당당히 이겨 보이겠다. 눈물은 그 때 가서 흘려도 늦지 않아.


빼꼼,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펴보니 저 멀리, 방금 내가 탈출한 우리가 보였다. 음, 꽤나 뛰었던 것 같은데 그리 멀리 가지도 못했구나. 아니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원래도 배 아래가 어두운 법이다. 오히려 이런 가까운 곳에 숨어 적의 허를 찌르는 게 상책일 수도 있다. 남아 있는 두 동족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서로끼리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내야지.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이라,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는 것 양해 바란다.

‘이봐요, 내 말 들립니까?’


회색 반점이 있는 흰 놈이 유리창에다 코를 바싹 들이밀었다.

‘자네, 살아 있었군!’

‘그럼 살아있다마다요. 형씨, 아까 내 귀 물어뜯었지요?’

‘그건 미안하게 됐어. 자네도 알잖나, 궁지에 몰리면 쥐새끼들이 다 그렇지 뭐.’

‘됐어요, 이제. 그나저나 인간놈은 아직 안 왔습니까?’

‘그래, 아직이야. 그런데 언제 돌아올지 또 모르지.’

‘다른 친구는요? 어쩌고 있어요?’


회색점은 궁둥이를 이쪽으로 돌리고 씰룩거렸다.


‘틀렸어. 냄새 맡아 보니 아주 맛이 가버렸다구.’

‘그렇군요. 아예 말도 않습니까?’

‘응, 벌벌벌 떨고만 있네.’

‘일단 한번 물어뜯어봐요.’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한참 엎치락뒤치락 하는 소리가 나더니 숨을 헐떡이며 회색점이 말했다. 우리 벽에 김이 하얗게 맺혔다.


‘제기랄, 내가 당할 뻔 했네.’

‘이제 어쩔 생각이오?’

‘글쎄, 아까 자네한테 제대로 당했으니 몸을 좀 사릴 것도 같은데. 당장 또 먹인다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굴지 않을까?’


무어라 중얼거리며 인간이 돌아왔다. 불길한 빛깔이 시야를 위협했다. 두 손이 시뻘갰다.


‘자네가 분명 물어뜯긴 했는데, 저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잖아?’

‘말씀대로요. 거기다 낯선 냄새도 나는구랴.’


성큼성큼, 인간은 비늘 덮인 족속의 우리로 향했다.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놈이 입맛을 다시는 통에 참았던 욕지기가 다시금 올라왔다. 우웩.


XX아아직배고프지XX가미안해 조금만기다리렴


뚜껑이 열렸다. 회색점과 나의 몸이 뻣뻣이 굳고 털은 곧추섰다. 아직 말도 다 나누지 못하고 계획도 세우지 못했는데. 어쩌지? 생각이 그치기도 전에, 피처럼 붉은 손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동족을 조심스레 붙들었다. 몸통이 붙들린 동족은 그제서야 정신을 찾았는지, 아니면 최후의 발악인지는 모르겠으나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고, 날카로운 이를 붉은 손가락에다 세게 박았다.


다행히도이건못뚫네


날카로운 앞니는 붉은 가죽을 뚫지 못했다. 당황한 듯 동족은 자리를 바꿔 다시 물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봐요, 저게 어떻게 된 거요?’

‘나도 모르겠네. 어찌 된 영문이지?’


아이구고만해라미안하다미안해

휴이짓도못해먹겠다다음부터는그냥먹이던대로만해야지


그럴거면 당장 그 손부터 놓고 말하시지, 거지 발싸개 같은 작자야.


다음에 벌어진 참상에 대해선 독자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회색점과 나는 절망과 당황 속에 그저 바라만 볼 따름이었다.


오늘은여기까지만주자 그나저나도망간녀석은어디로갔담


두 마리째 먹어치운 악마는 이제야 탐욕스러운 허기가 좀 채워진 듯, 혀를 날름거리며 태양 아래 눈을 감았다. 인간은 걱정스러운 듯 이리저리 서성이며 이곳저곳을 들추어 보았다. 그러나 코앞에 내가 숨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리라. 당장이라도 들킬까봐 겁이 털끝까지 섰지만, 회색점과 멀리 떨어질 수는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어쩐담.’


유일한 탈출구, 그것도 위험이 상당한 도박이었던 인간의 손으로도 나갈 수 없다면 앞으로 벌어질 일이야 뻔했다. 독 안에 든 쥐라는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상황이 딱 그런 꼴이란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일단 좀 계세요. 제가 한번 방법을 찾아 볼테니. 배가 고프진 않소?’

‘나는 괜찮아. 하루 이틀쯤이야, 버틸 수 있겠지. 자네는?’

‘까짓거, 며칠이고 사막을 헤매도 끄떡없는 게 우리 족속 아니겠어요. 혹시나 뭐라도 찾을 수 있으면 틈으로 넣어 드리겠소.’

‘고맙네, 고마워. 그리고, 그 때는 참말로 미안했어.’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심지어 이런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 고귀한 햄스터들은 이런 족속인 것이다.


‘됐어요, 그만. 무사히 살아서 부모형제에게 돌아 갑시다.’


하진짜큰일났네 어디구석에서죽어서썩는건아니겠지


요놈아, 그만 쑤석거리고 너도 얼른 가서 잠이나 자거라. 나가서 죽어 버리면 더 좋고.


한참을 먼지를 날리며 소란을 떨던 인간은 결국 수색을 포기했다. 위험한 순간도 몇 번 있긴 했지만, 아직은 젊고 날렵한 나라 발톱을 박아넣어 거꾸로 매달리는 일은 몇 초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에이모르겠다내일가게다시가서쥐덫같은거라도사와야겠어


이윽고 인간은 제 굴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공기 중에는 아직도 비린내, 피 냄새와 똥오줌 냄새가 떠돌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한 몸 누일 곳은 없었지만,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잠을 청해야 했다. 배는 아직 고프지 않아 다행이었다. 살아남자, 살아남아야 한다. 휴식을 푹 취해 머리를 굴려 동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

대탈주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나 더 큰 고난이 닥쳐올지는 아직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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