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햄스터로소이다 - 5

연재소설 | 5. 악마와의 대화

by 흰코뿔소

꿈을 꾸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빨이 톱날처럼 늘어선 아가리가 활짝 벌어져, 위턱은 하늘에 닿고 아래턱은 바다에 가 닿았는데, 어찌나 깊은지 목구멍 안은 꼭 밤하늘처럼 검었다. 열 가닥으로 갈라진 혀는 이리저리 꿈틀대며 불길하게도 흔들렸다. 하얗고 동그란, 눈을 사를듯한 태양이 주둥이 위로 천천히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치며 거슬리는 소리를 내던 비늘들이 일제히 섰다. 누런 비늘이 황금빛으로, 모래빛으로 빛나기 시작했고, 감겨 있던 눈깔이 떠졌다. 빨려들 것 같은 아홉 쌍의 동공이 일제히 움직여 내 쪽을 바라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내 뒤로 지상의 모든 앞니 긴 족속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털빛도, 꼬리 길이도, 이빨 길이도, 발가락 수도, 털의 길고 짧음도, 덩치도 저마다 모두 달랐으나, 얼어붙은 걸음으로, 텅 비어 버린 눈을 하고선 벌어진 주둥이로 향하고 있었다.


이봐요, 밀지들 말아요, 나는 저항했지만 앞니 긴 족속들의 무리는 그 악명만큼이나 수가 많아서, 도저히 어찌 해 볼 도리 없이 밀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빨에 낀 살점이 보일 만큼 주둥이가 가까워지고, 피와 오물의 냄새를 참을 수 없을 때쯤,


귀를 찢는 비명에 눈을 떴다. 회색점의 목소리였다. 조심스럽게 드리워진 천을 들추고 코만 내밀어 냄새를 맡아 보니 낯설고 사악한 냄새가 한꺼번에 밀어닥쳐 무뎌진 코를 들쑤셨기에 순간 머리가 띵했지만, 확실히 어제보다는 인간의 냄새가 덜하다는 느낌이었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목이 터져라 회색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바로 튀어나갈 수는 없었다. 코앞에 쥐덫이 놓여 있을지, 끈끈이가 놓여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없어, 없어, 나갔다고, 인간 놈은 나갔어, 빨리 와서 나 좀 살려 줘!”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리소!”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는 제비처럼 나는 부리나케 튀어나갔다. 총총총, 바닥을 가로질러 기둥을 타고 오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늘 덮인 악마의 우리를 가리는 미닫이문은 열려 있었고,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아뿔싸, 절제라고는 모르는 저 마귀 같은 버러지의 식욕을 얕잡아봐서는 안 되었는데. 하루만에 우리 동족을 두 마리나 집어삼키고도 모자랐더냐, 유사流砂와도 같은 네놈의 허기는!


뚜껑을 열 힘도 지혜도 없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유리벽을 사이에 둔 저 악마와 말로써 시비를 따지는 것 뿐이었다. 통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자괴감이 네 발을 움직였다.

“멈춰라, 이 버러지 같은 놈!”


위엄을 가득 담아 나는 멍청하게 생긴 악마의 우리 앞에 섰다. 놈은 미동조차 없었다.

“살려줘, 살려달라고, 나 좀 꺼내 달란 말이야!”

“시끄러워요, 일단 좀 가만히 있어 봐요. 지금 꺼내 주려 하고 있지 않소?”


회색점과 내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걸 놈은 멍청하게 양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대뜸 앞발을 들어 회색점의 모가지를 눌렀다. 길고 구부러진 발톱 사이로 찢어지는 비명이 터졌고, 힘이 좀 더 실리자 애처롭게 바람 새는 소리가 되었다.


“이봐, 진정해! 말로 하자고, 일단 그 발부터 좀 치워!”


들은 척도 않았다.


“살려-”


염병할, 어떻게 해야 한담, 머리가 돌지 않았다. 안 돼, 공포가 또 닥쳐온다, 사로잡히기 전에 나는 일단 아무 말이나 닥치는 대로 주워섬기기로 했다.

“야, 이놈아, 햄스터 말이 말 같지 않느냐? 발을 치우라고 하잖아! 이 징그럽고, 흉측하고, 사악한, 조물주가 빚다 만 실패작 같으니라고, 자비도 예의도 교양도 없는 끔찍한 족속아, 새한테 물려갈 놈들아, 찢어진 눈깔, 갈라진 혀, 배나 질질 끌고 다니는 버러지 같은 것들아, 고양이한테나 찢겨 죽을 놈아, 이 무식한, 벼락이나 맞을, 얼어나 죽을, 염병할, 허물이나 벗는, 차가운 피 - ”


“조용.”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몸부림치던 회색점도, 대대로 이어온 전통의 욕설과 저주를 퍼붓던 나도 얼이 빠져 버렸다.


쉭쉭거리며 악마가 말을 이었다.

“너희 쥐새끼들이 시끄러운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그저 듣기만 해도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였다. 낮고, 메말랐고, 감정이라곤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바람 스치는 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웠음에도 단어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히는 듯 했다. 그렇지만 담대하게, 숨통에다 숨을 가득 채우고 나는 놈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 발 놓아. 어서!”


“내가 왜?”


눈을 감지도 않고 놈이 대답했다.


“만족이라곤 모르는 게냐, 이 탐욕스러운 놈! 어제 우리 혈육을 두 마리나 집어삼켰으면 남아 있는 비참한 삶을 회한과 반성으로 보내도 모자랄 판에, 더 큰 죄악으로 혼을 더럽히겠다는 속셈이냐?”


“조용.”


귀찮다는 듯이 놈이 앞발에다 힘을 더 실었다. 회색점은 공포로 눈알이 거의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조용히 해. 잘 자고 있었는데, 네 동족이 내 머리에 떨어졌어. 내 머리 위에다 똥오줌을 싸질렀어.”


“흥, 네놈한텐 똥오줌도 과분한 처사야, 네 발 달린 죄악의 덩어리 같은 놈아. 혀가 갈라져서 말은 제대로 할 수나 있니? 비늘을 몽땅 뽑아다가 튀겨 버릴 놈아.”


아뿔싸, 도발이 지나쳤나, 순간 겁에 질려 놈의 눈치를 살폈지만, 놈은 아랑곳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직 밥 먹을 때 안 됐어. 더 자야 돼.”


“그럼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네놈의 코딱지만한 뇌를 써서, 우리 합의를 보는 것이 어떠하냐?”


“합의가 뭔데?”


“내 동족을 내보내 줘. 그렇다면 평안한 잠을 보장하지. 바람보다도 조용하게, 이슬만큼이나 가볍게 빠져나갈 테니까.”


피식, 하고 놈이 콧김을 뿜었다.


“멍청한 소리. 아무도 못 나가.”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도 못 나가. 뚜껑도 못 열어. 열게 안 돼 있어.”

“허튼 소리 말아, 네 족속들이 멍청한 건 뭇짐승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만, 설마 지금까지 탈출 시도도 안 해 봤다는 말은 아니겠지?”


놈이 뚫어져라 내 눈을 바라보았다. 차갑디차가운 눈동자가 핏줄을 타고 흘렀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나가면 어디로 가는데?”


“그거야 네놈 사정이지, 내가 알려줄 것 같아?”


놈이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못 나가, 나간대도 똑같아.”

“같은 말만 지껄이지 말고, 어서 문을 열어!”


“가만 두면 시끄러워. 똥오줌을 또 싸지르면 냄새도 심할 거야.”


“그러니까, 문을 열란 말이야, 이 멍청한 놈아!”


“숨길 곳도 없어. 귀찮아.”


“망할 놈의 문을 열어! 몸을 세우고 앞발을 뻗어다 천장에다 대고 발톱으로 끼리릭, 하고 밀어 보란 말야!”

“조용히 좀 해. 시끄러워. 피가 덜 돌았어.”


“아주 돌아버리겠군, 인간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얼마나 더 숨어 있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 실랑이 할 시간이 없다고, 이놈아!”


내 목소리는 어느덧 고함에 가까워졌다. 답답함과 초조함에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는데, 놈은 우둔한 소리만 늘어놓으며 혀만 날름대고 있었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이럴 시간이 없어! 다시 한 번 벽력처럼 진엄한 설교를 내리꽂으려던 찰나에 -


찍!


“무슨 소리야?”


누렇고 찢어진 눈과 까맣고 동그란 눈이 회색점에게로 향했다. 회색점은 혀를 길게 빼물고, 공포에 시퍼렇게 질려 눈은 까뒤집은 채로 숨이 멎어 있었다.


이런, 제기랄. 나는 길게 탄식을 흘렸다. 이런, 제기랄. 염병할. 우라질.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죽은 건 싫은데.”




비늘 덮인 족속들이 죄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나는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증오에 차 간절하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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