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햄스터로소이다 - 6

연재소설 | 암컷 인간의 등장

by 흰코뿔소

망연자실해 회색점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공허가 밀려왔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아니, 아니야, 그 전에,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난리를 겪어야 하는가, 하고.


“이봐, 이 벼락맞을 짐승아, 내 동족을 가만....”


지랄 같은 짐승은 그새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무어라 타박할 기운도 없었기에, 전신에 진이 온통 빠진 채로 나는 가만 앉아 있었다.


삑, 삑, 삑 삑, 띠로롱, 하고 인간 굴이 열리기 전까지는. 아직 그래도 생존 본능은 건재하다. 그래야만 한다. 역순으로, 기둥을 타고 내려와 다시 어두운 나무 상자 아래로.


어휴덥다더워뭐가이렇게덥냐아직6월밖에안됐는데


아주 쪄 죽어 버리라지, 개 같은 놈아.


뭐야우리XX이입맛에안맞았나안먹고있었네 아니뭐야죽었나이런


그래, 죽어 버렸어. 사자死者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라곤 없는 게냐, 네놈은.


슬픔은 아직 아껴 두자. 일단은 살아남아야 한다. 네 마리 동족이 납치되어 와서 오직 나뿐만이 살아남았다. 통탄할 일이다. 아니야, 그런 만큼 목숨의 중한 무게를 싣고 나만은 살아남아 길이길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 내가 아니면 내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면 내 손자가, 아니더라도 손자의 손자가. 네 자손의 자손이 모두 스러지는 그 날까지, 네 족속을 저주하리라.


좋아그러면이걸어떻게해야되나 아저씨말로는그냥놓으면된다는데 목이나뭐잘리는건아니겠지


아주 대놓고 바라지 그러냐, 이 염병할 놈아.


덜컥, 차르릉, 칭.


하하하, 웃기지도 않구나, 그딴 허술한 수작에 내가 넘어갈 것 같으냐?


이 수작이라 함은, 저 멍청한, 상통은 길고 눈깔은 뱀처럼 길게 찢어지고 배때기는 두꺼비처럼 부풀어오른 인간이 꼴에 없는 지혜를 긁어모아 설치한 덫을 말하는 것인데, 보아하니 우습다거나 한심하다기보다는 외려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우리 햄스터 가문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저런 허술한 함정에 이 몸이 감히 걸릴 것이라 생각했단 말이냐? 철망으로 된 네모난 통에 저 튀어나온 요철을 건드리면 아마 뚜껑이 덜커덩, 닫힐 테지.


이 보라구, 미끼라고는 멍청한 비늘 덮인 물고기 놈들이나 환장을 할(하여튼, 비늘 덮인 족속들은 물이건 뭍이건 간에 하나같이 우둔하기가 비길 데가 없다) 꾸물거리는 벌레 한 마리 꿰어 놓고는 내가 걸릴 거라 기대한게냐? 쯧쯧, 서툴다, 서툴러. 그 아저씨라 함은 아마 니놈이 들락대는 가게의 주인일 테지? 어째서 네놈들같은 하찮고 똑똑치 못한 인간들이, 나나 우리 동족들을 괴롭히고 잡아다 팔아 대는지 나로서는 대관절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야. 통재라, 네놈 인간들이여, 저런 원시적인 도구를 가지고서는 나처럼 영리한 족속들을 잡아다 그 뭐야, 가게에서니 뭐니, 판다고 설치는 꼴이. 비웃는다, 나 위대한 햄스터 가문에서도 가장 위대한 햄스터가 될 나는, 너희 역겹고 덜 진화한 인간들을 비웃고 또 조롱한다!




음. 우선 이 모든 소동의 훗날 기록자로서 감히 평하건대, 필자의 하찮은 글을 읽어 주시는 것은 모두 나와 같은 앞니 긴 무리이거나, 물론 내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에 준하는 지능을 지닌 다른 짐승 족속이라 가정할 때, 앞으로 벌어질 일은 누구나 이해하시리라. 이해할 것이다. 이해를 바란다. 이해하시라.


자, 내 일단 설명을 드리리니.


햄스터는 작다. 작은 만큼,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런 만큼 자주 먹어야 한다. 이는 내 잘못도 우리 조상님의 잘못도 아니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앞뒤 가릴 줄도 모르는 벼락이나 맞을 조물주 잘못이겠지. 안다, 내가 앞으로 하는 말은 변명이 아니다, 그저 온건하고도 온전한 사실에 입각한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설명의 나열일 따름. 나는, 배가 고팠다. 이는 당연한 생리 현상이니, 비난의 말은 잠시 접어 두시라. 배가 고팠다. 청계천 악의 소굴에서 탈출한 지 벌써 하루는 꼬박 지나, 보기 좋게 통통한 내 배는 부끄럽게도 쪼그라들어 뱃가죽이 등가죽에 달라붙도록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청결한 – 나는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배웠는데, 어떤 굴이든 간에 겉보기로는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그것이다 – 이 저주스러운 인간의 굴에는 바닥을 기는 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눈앞에 아른거리고 꿈틀거리고 즙이 철철 넘치는 밀웜이 바늘에 꿰여(내가 마침내 배고픔에 굴복하기까지 그것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살아 있는데, 제대로 된 햄스터라면 달려들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아, 물론, 그 후에 있을 계획도 다 세워 놓았다. 내가 저놈을 빼들면, 그놈이 꿰여 있던 바늘이 내려와서, 그러면 철문이 닫히리라. 그렇다면야 철문이 내려가기 전에 잽싸게 바람처럼 빠져나오면 될 일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더라. 밀웜의 대가리를 딱 붙들고 조심스럽게 빼내려는 순간(심지어 아직 채 빼내지도 않았다!) 철문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런, 젠장. 다시 말하지만, 당신들 – 아니, 사과드린다 – 독자들 그 누구도 내 상황에 있었더라면, 그런 악마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고서는 못 배겼을 것이다.


아무튼, 문이 닫혔다(이제 내 해명은 그만 듣고 싶으시리라고 제 독자들도 바랄 것이다). 더 짜증나는 점은, 게을러 터져 해가 중천에 높이 떠올랐을 때에도 제 굴에서 안락히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었을 인간 놈이 내가 한탄과 탄식을 조상에게까지 다 들릴 정도로 내뱉을 동안에도 굴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올거면 빨리 나와라, 나와서 나 좀 빼내 다오, 그러고서야 저 비늘 덮인 악마의 우리에다 던져넣든 말든 니 좋을대로 하려믄.


어라잡혔네 음이걸어쩐담일단나갔다와서생각하자


인간이 다시 나갔다.


굴 밖으로 자꾸 나다니면 좋은 일이 없다, 오랜 격언이다. 나갔다 온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아니, 이놈아, 나가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좀 꺼내 달라니까. 꺼내 주면, 내가 네놈 손을 한번 다시 물어뜯어 주마,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저 도마뱀이라도. 못할 일이 무어냐, 해가 뜨지 않으면, 피가 차마 돌지 않으면 행동도 제대로 하지 못해 굼뜨기가 이를 데 없는 놈 따위 제압하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 미끼였던 밀웜은 진작 해치우고, 달아날 방도를 궁리할 참에, 인간이 돌아왔다.


삑, 삑, 삑, 삑, 도로롱, 삐로롱, 으, 역겨운 소리. 하늘 아래 땅 위에선 아무래도 들을 수 없는 소리.


자기야청소좀해냄새나잖아

자기온다고청소하긴했는데그래도냄새가많이나나

뭐야이게오랜만에오는데


비늘 덮인 악마가 눈을 떴다.


“또 왔군, 암컷이.”

“뭐야, 네놈이 아는 인간이냐?”

“그럼, 잘 알다마다.”


그러고서는 놈은 말이 없었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마니, 네놈은. 저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내 동족을 두 마리나 먹어치운 저주받을 짐승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꼬리를 탁, 내려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야, 이놈아, 너는 부모도 없니, 가정교육도 못 받았어? 너희 어머니께서 남하고 얘기를 하다 말고 주둥이를 싹 닫아 버리라고 하시더냐? 저 인간이 뭔데? 이놈아, 돌아와서 얘기를 하란 말이야!”


탁, 탁. 두터운 모래바닥에 꼬리를 내려치는 소리만 들릴 뿐,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는 두 인간의 발소리에 나는 털이 벌벌 떨렸다.


어머자기야저게뭐야너무귀엽다


응? 아저거


저거가뭐야저거가 햄스터아니야 자기가산거야?


응?응내가샀지귀엽지 햄스터야햄스터


응너무귀여운데 근데왜저기있어도망갔어?


응?응도망갔어내가키우던건데 하하저기잡혀있네


빨리꺼내줘배고프겠다


응그래야지



덜컥, 차르릉, 칭.


역겨운 향기가, 저 수컷 인간에는 비할 데도 못 되는 역겨운 암컷 인간의 향기가 코 끝에 훅 풍겼다. 놔라, 놔, 이 무식한 놈아, 놓으라니까? 제발 날 좀 가만 내버려 둬.



자기야얘겁먹었나봐자꾸꿈틀거려 근데자기저건언제버려너무징그럽잖아


버리긴왜버려자기야 우리XXX가얼마나귀여운데


귀엽긴개뿔 흉측하게생겼잖아 혀나날름거리고




암, 우둔한 인간이라도 알 것은 아는구만. 냄새는 고약했으나, 나는 이 암컷 인간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계 속>



모든 햄스터들은 혈관에 조상들의 기억이 흘러서 대충 알 것은 다 알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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