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미 Jul 22. 2020

성수동 솜 공장에서 알바하기

2013년의 성수동. 

2013년, 난 29살이었다. 회사원으로 서른을 맞이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던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남미를 가겠답시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는 황열병 예방 접종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다.) 1월 10일에 회사를 그만두고, 남미에 간 날이 1월 30일.. 뭐 그쯤이었는데, 그 사이 동안 아빠는 노느니 공장에 와서 일이나 하라고 했다. 시급도 두둑이 쳐 준다고 했다. 오예, 그럼 점심도 주냐고 했더니, 아빠는 준다고 했다. 


"그럼 할래."


실은 어린 시절 이후로, 공장에 온 적이 별로 없었다. 때때로 진행되는 공장 고사 때 엄마를 따라 시루떡이나 돼지고기 편육을 먹으러 간 정도? 뭐 그랬다. 중고등 학교 때는 학원을 들락날락거리느라 꽤 바빴던 것 같고 (공부는 못했지만 학원은 다녔다.), 대학교 때에는 연애하느라 (그렇다고 화려한 연애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 고) 바빠서 아빠의 공장은 그냥 아빠의 일터로만 생각하고 나는 솜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거의 20년이 다 지나서야 공장에 제 발로 걸어갔다. 


우리 공장은 성수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1월, 스산한 겨울의 성수동. 저 멀리서 불어오는 차가운 한강 바람이 내 피부의 모든 수분을 앗아가는 것 같았다. 패딩 하나를 입었는데, 추웠다. 공장은 따뜻하겠지. 나는 종종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추웠기도 했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그랬다. 대낮에 말이다. 지금의 성수동은 패션 피플들이 거리를 활보하지만, 2013년의 성수동이 어느 정도로 무서웠냐면, 영화 <범죄도시>에서 처럼 피 냄새 그득한 패싸움이 일어나도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무서웠다. 빼곡하게 공장들이 있었고, 수시로 지게차와 트럭이 드나들었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빨리 비키라는 경적소리가 다시 움찔하게 만들었다. 


"와 씨. 쫄았네."


첫날 아빠한테 말했다. 내일부터 12시에 성수역 3번 출구로 데리러 오라고 했다. 알바생한테 점심도 주는데 무슨 지하철 역까지 데리러 와야 하냐고 아빠가 뭐라 뭐라 했지만, 다음날부터 아빠는 꼬박꼬박 나를 데리러 왔다. 아빠가 생각해도, 성수동은 진짜 무서웠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공장에서 했던 일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베개솜을 사정없이 때리기, 봉제된 베개피를 솜을 넣을 수 있게 뒤집기, 에.. 기타 공장 이모 삼촌들에게 아빠의 디렉션 전달하기, 점심 상 차리기 등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정없이 베개솜을 때리는 것은 꽤나 스트레스가 풀리는 일이긴 했는데, 일이 끝나고 집으로 가면 어깨도 사정없이 아팠다. 솜을 넣는 것은 한방에 기계가 훅, 하고 넣지만, 솜을 균등하게 하려면 완전히 때려줘야 하기 때문에 이 일은 상품을 위해선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베개피를 뒤집는 것도 피 안에 손가락을 넣어서 예쁜 사각형 모양으로 빼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나오기 때문에 미치고 환장한다. 난 할당된 베개피를 매번 다 못 뒤집어서 집으로 가져와서도 뒤집기도 했다. 나원참. 야근도 이런 야근이 없었다.

체험, 솜의 현장

한 이틀을 일했는데, 그 주말에 난 몸살에 걸려버렸다. 

여태까지 회사에서 앉아서만 일을 하다가 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적응되지 않는 노동에 몸이 이상반응을 했던 것 같다. 아, 그리고 공장은 정말 추웠다. 한강 변에 있는 오래된 공장의 허술한 새시 사이로 찬바람이 다 들어왔는데, 공장 이모 삼촌들은 반팔을 입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선 나만 추위 과민 반응자 같았다. 


주말 동안 골골대는 나를 보고, 아빠는 베개 솜 두드리는 건 하지 말고, 세금계산서 끊고 전화나 받으라고 했다. 마침 시대가 바뀌어 올해부턴 전자 세금계산서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빠의 노트북을 새로 사서 세금계산서용 메일을 만들고 거래처 별로 착착 정리해서 내가 없더라도 언제든 아빠 혼자 세금계산서를 쉽게 끊을 수 있게 했다. 난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다. 아빠에게는 정말 많은 거래처가 있었다. 평소에도 수도 없이 서울에 남은 마지막 솜공장이라고 아빠가 말해왔었는데, 정말이지 그 명성에 걸맞을 만큼 거래처가 많았다. 거래처를 보면서, 저마다 다양한 용도로 솜을 사용하는 것도 그제서야 알게 됐다. 그건 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아빠의 솜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절로 아빠가 자랑스러워졌다. 


그런 공장과의 추억도 잠시, 나는 다시 공장을 떠나 남미로 갔고, 또 오랫동안 솜을 잊고 지내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의 성수동 공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