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곳곳에 단내가 은은합니다. 며칠째 감을 따고 있거든요. 이미 잘 익어 떨어지거나 떨어진 채 익은 감이 풀밭에 뒹굽니다. 물컹하게 익어 터진 감에선 달곰한 술 냄새가 나고요. 벌레도 흙도 결실을 즐기는 가을이지요. 폭우, 폭염, 가뭄에 맘 졸였지만 올해도 끄떡없이 대봉감나무 두 그루엔 주렁주렁 열매가 달렸습니다.
감이 떨어져 터지도록 버려두는 건 안 될 일입니다. 감지덕지 맛나게 먹어주는 게 섭리죠. 높이 달려 붉게 익은 건 눈치 빠른 새들이 벌써 맛보았습니다. 조금 덜 익은 것들이 내 차집니다. 길게 뺀 고지가위가 있어야 하죠. 고지가위 3미터에 뻗은 팔까지 치면 나무 키가 5미터도 넘는 것 같습니다.
떨어지면 깨질세라 감 달린 가지를 하나씩 물고 잘라냅니다. 가지가 있어야 곶감 걸이에 걸 수 있거든요. 당연히 팔뚝, 어깨, 허리, 목까지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모기는 왜 그리 많은지, 미리 알고 칭칭 싸맸더니 변변찮은 얼굴로 날아드네요. 그래도 장대 끝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손맛에 흐뭇하기만 합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때깔 좋은 건 숙성시켜 연시를 만듭니다. 말랑말랑 달콤한 맛이 아까워 냉동실에도 채워 넣습니다. 아이스홍시죠. 하지만 공간이 넉넉지 않네요. 두고두고 먹을 수 있도록 장아찌를 만듭니다. 단단한 녀석들로 꼭지를 따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을 부으면 장아찌가 된답니다. 석 달 후에나 맛볼 수 있는데 올해 처음 해보는 거라 기대가 큽니다. 말랭이와 곶감도 만들어야죠? 껍질을 벗겨야 하는데 양이 만만치 않습니다. 손가락이 곱도록 칼끝을 돌려 곶감을 걸고, 나머지는 잘라서 채반에 널었습니다.
해마다 요령을 익혀가지만 순조롭지만은 않습니다. 추적추적 장마처럼 내리는 가을비가 훼방을 놓습니다. 물러진 말랭이가 채반에 늘어 붙어 엉망이 됐습니다. 곶감은 생각처럼 말갛게 마르지 않고 검은 반점이 늘어갑니다. 너무 잘 익어 터지거나 상처 난 홍시에선 진물이 나와 날파리가 들끓고요. 결국 말랭이에 곰팡이가 슬어 두 채반이나 내다 버렸습니다. 꼭지 쪽이 물러서 떨어진 곶감도 있고요.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건망증 때문인지, 정성이 부족해서인지 야무지질 못합니다.
쉬운 게 없네요. 입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과정이 말이죠. 많은 분들의 수고로움을 직접 해보고야 깨닫습니다. 예전엔 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익히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돈이 그 과정을 수없이 난도질해 놓았습니다.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서 넘겨짚다가 싸움이 늘어가는 듯합니다. 그걸 이용하는 비루한 사람도 많아지고요. 천감만려(千感萬慮), 감을 손질하다 보니 만감이 교차하네요.
아차, 감 얘기가 길어져 밤을 잊을 뻔했습니다. 감이 디저트라면, 밤은 주식에 가깝죠. 열매가 아니라 씨앗이고요. 먹을 게 부족했던 선조들은 밤을 밥처럼 많이 먹어 ‘밥나무’라고 불렀답니다. 그래서 훗날 밤나무로 불리게 되었다는데요, 그래선지 바늘 돋친 밤송이 속 반지르르한 밤톨을 집어 올리면 가진 돈 없어도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투실투실한 알밤은 껍질을 벗겨 생율로 아드득 씹어 먹고, 밥 안칠 때 넣어 구수한 밤밥도 짓고, 포슬포슬하게 삶아서 달콤 든든하게 한 끼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엔 주위에 나눠드려도 예전처럼 반가운 낯빛이 아닌 듯해 떨떠름합니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인가 봐요. 알이 커서 그만한 수고는 할 만한데 말이죠. 이따금 벌레가 나오는 재미도 있고요.
가을비에 모과가 떨어져 뒹굽니다. 사람들이 모과에 네 번 놀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꽃이 예뻐서, 열매가 너무 못생겨서, 못생긴 열매가 향이 좋아서, 향은 좋은 데 맛이 없어서 놀란다네요. 차를 끓여 마시면 기침을 멈추는 데 좋고, 술을 담그기도 하는데 요즘엔 보기 드문 얘깁니다.
시골살이도 놀랄 일이 많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싶어요. 다채로운 꽃과 나무의 존재에 놀라고, 가꾸고 돌볼 일이 많은데 아무리 일해도 티가 나지 않는 것에 놀라고, 한 일에 비해 거저 얻는 것이 많아 놀라고, 사라진 듯했던 생명이 되살아나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니까요.
놀랍고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아직까진 말이죠. 이제 찬바람 불고 금세 겨울이 찾아오겠죠?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난로에 지필 장작을 미리 들여놓았습니다. 노는 이야기를 마쳐야 할 계절이네요. 덕분에 한 해 동안 뜨락에서 잘 놀고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