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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himaro Mar 22. 2021

미드소마(Midsommar)

白夜의 恐怖

(spoiler)


많이 떨렸던 도전


아리 애스터 감독의 <유전>이라는 영화를 며칠 전에 봤다. 여자친구와 여러 공포 영화 도장깨기를 하다가 최종적으로 남은 영화가 <유전>이었기 때문에 봤는데, 여태 경험하지 못했던 공포였고 심지어 정말 무서웠다. 배우들의 연기도 연기였지만 연출 자체가 섬뜩함의 연속이었다. 결말이 살짝 아쉬웠지만 '아리 애스터' 감독 표 공포영화는 이렇다는 것을 톡톡히 느꼈다.

 <유전> 개봉으로부터 2년 후, 아리 애스터 감독이 또 하나의 공포 영화를 내놓았다. <미드소마>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개봉 당시 왓챠에 수 없이 올라오길래 어떤 영화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런데 찾아보는 평마다 '너무 잔인하다.', '끔찍하다.', '이렇게까지 표현해야만 했나?'. 나와는 안 맞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사실 공포 영화가 나에게 있어서 고어 영화와 같은 위치에 있는 장르였다. '살면서 찾아서 보지 않을 것이고, 우연히 보더라도 스쳐 지나갈 것이다.', '나와는 전혀 안 맞는 장르일 것이고, 누구와 같이 보는 것 아닌 이상 접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음 가짐을 하고 있었던 나였는데, 사람이 좋아지면 무언가는 함으로써 약간의 공감대라도 형성하려 하나보다. 그렇게 공포영화를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즐기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고, 자연스레 같이 보는 사람도 생겼다.

 이런 사례 아닌 사례가 있었기에 고어 영화에도 약간의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유전>의 임팩트가 워낙 컸다보니 아리 애스터 감독의 후속작들이 나와 잘 맞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도 크다. 근데 돌이켜보니 <유전>이 나에게 맞았던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공포 영화'로서의 역할에 극도로 충실했다는 이유가 있었을 뿐. 혼자 봤으면 아마 중간에 껐거나 뭔가 하나 던졌을 것이다. <미드소마> 역시 나에게 어떤 다른 의미로 맞는 영화가 될지, 약간의 호기심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이 호기심이 어떻게 보여 먹힐지...



§포스터가 줬던 안정감


 영화 <바닐라 스카이>의 포스터를 보면 굉장히 뽀샤시한 톰 크루즈의 얼굴만이 떡하니 담겨있다. 그 어떤 스포일러 없이 톰 크루즈의 미모에 이끌려 그 영화를 보게 된 관객들도 엄청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체적으로 '비극'을 담은 영화였다. 포스터가 관람객에게 주는 편견은 엄청 뚜렷하다. 영화의 장르가 무엇인지 보여주기도 하고, 주연 배우는 누가 출연하는지, 영화의 평은 어떠한지, 혹은 누군가에게는 소장용으로 남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바닐라 스카이> 같이 장르를 뒤바꾸는 포스터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미드소마> 역시 그중 하나로 보고 있다. 영화관 아니면 포스터를 크게 볼 일이 없으니 항상 왓챠에서 조그맣게 보고 있었는데, 작게 본 <미드소마>의 포스터는 밝은 배경과 함께 한 소녀가 머리에 화환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포스터를 확대해보니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울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소녀와 함께 '90년에 한 번, 9일간의 축제, 당신은 선택됐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다른 포스터에는 '올해 최고의 공포영화'라는 말까지 적혀있었다. 사실 '올해 최고의 xx영화'는 너무 식상한 표현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공포 영화였다. 여기서 놀랐다. 이게 공포 영화였다고...?


§스웨덴 하지 축제 간단 개요


 <미드소마>의 뜻을 찾아보았다. 스웨덴어로 Midsommar, 영어 표기로 Midsummer's Day 즉, 하지 축제를 나타낸다. 이 영화의 제목이 <미드소마>(Midsommar)인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하지 축제 중 스웨덴 하지 축제를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 하지 축제는 크리스마스와 함께 2대 축제로 여겨질 만큼 엄청 독특하고 큰 축제이다. 매년 6월 19일에서 26일 사이 즉, 한 해 중 낮이 가장 긴 하지를 기념하여 9~10일 정도 행해지며, 스웨덴에서는 과거 농경 시대에 비옥의 계절인 여름을 환영하기 위해 하지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하지 축제는 '물'과 '불'을 주요 요소로 삼는다. 이 영화에서도 물과 불은 좀 다른 의미로 정말 중요한 요소들로 작용한다. 또한 시간상으로 보면 하지이기 때문에 밤의 공포보다는 '낮'의 공포를 소재로 하였다. 이 역시 엄청 신선한 공포의 요소였다.


§<미드소마>


 원래 같으면 배우를 소개하고 싶지만, 아는 배우가 딱히 없다. 그나마 아는 <트랜스포머 : 사라진 내 돈>에 나온 잭 레이너,  <메이즈러너 시리즈>에 출연했던 윌 폴터 역시 많이 본 작품이 없어서 소개할 내용이 없기에 바로 간단한 줄거리로 넘어가 본다.


<미드소마>의 전체적인 전개를 담은 그림

 

 우울증을 앓고 있던 동생이 부모님과 함께 자살을 하여 하룻밤 사이에 혼자가 된, 정신적으로 불안함을 갖고 있던 대니, 그의 최고의 의지 대상이었던 남자친구 크리스티안, 그리고 그의 친구들 마크, 조쉬, 펠레는 펠레의 스웨덴 여행을 따라나서게 된다. 사실 대니 몰래 한 계획이었으나 결국 들키게 되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대니를 놔두고 갈 수 없었던 크리스티안은 결국 데리고 가게 되었다. 사실 크리스티안은 조쉬와 함께 논문을 쓰기에 최고의 조건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려고 한 것이었고, 대니는 크리스티안 없이는 혼자 있기 힘들었기에 같이 따라가게 되었다. 감독은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여러 떡밥들을 뿌린다. 영화가 시작될 때 큰 벽화 같은 그림 한 장이 나오는데, 이 벽화가 영화의 전체적인 전개를 담아낸 것이며, 동생의 사체를 클로즈 인하는 장면은 관객에게도, 대니에게도 앞으로 자주 보일 것을 암시했다. 그리고 대니가 크리스티안에게 기대어 우는 장면에서 비춰진 방 안의 모습은 대니의 과거, 미래, 현재를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비교적 매우 '친절한' 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렇게 간 스웨덴의 하지 축제 현장. 감독은 여기서 관객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안심을 시키려고 한 듯 하다. '이 영화는 공포 영화가 아닌, 축제를 즐기러 간 사람들을 다룬 영화입니다.'라는 말을 우리의 머리에 심어주기라도 하듯이 매우매우 밝은 배경에 흰 옷을 입고 머리에 화환을 두른, 기쁨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근데 알고보니 이 역시 매우 정직한 표현이었다. 그냥 원래 '미드소마'는 이런 축제의 모습을 하고 있던 것이고 그걸 그냥 보여준 것 뿐이었다. 이 역시 여기 나오는 인물들과 관객을 동일시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등장인물들에게는 저 마을 사람들이, 관객들에게는 감독이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나서 실컷 괴롭혀주겠다는 의도가 들어가 있다.


<미드소마>의 처음이자 최고의 고비


 그렇게 시작된 9일간의 축제, 그리고 첫 날 진행된 '절벽'. 이 마을의 호르가는 나이를 18세 단위로 끊어 사계절과 같이 표현한다. 18~36세는 학습, 36~54세는 노동, 54~72세는 멘토의 나이이며, 72세가 넘어가면 절벽 위에서 비석에 본인들의 피를 바르고 나서 뿌듯하게 떨어지는(?) 의식 등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장면으로 나간 관객이 꽤 된다고 한다. 나도 이 장면은 눈살을 엄청나게 찌푸리며 봤다. 심지어 고어틱한 장면을 정말 못 보는 나로서는 정말 뜬 눈으로 보기 힘들었다. 첫 번째로 바위에 얼굴로 떨어진 할머니는 그래도 견딜만 했는데, 두 번째로 수직 낙하하신 할아버지....까지도 괜찮았다. 근데 하필 다리만 부러져 숨통이 붙은 할아버지를 '아, 안 돼! 살아있어!'와 함께 저 큼지막한 우드 해머로 머리를 내려치는 순간 '아'라는 소리가 나왔는데, 때린 데 또 때린다. 두 대나 더... 아작을 내버린다. 진짜 새벽에 영화보는데 입 틀어막고 '읍! 으읍!' 이러면서 봤다. 끄고 잘 생각도 잠시 했는데, 웃기게도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맘이 조금 편해졌다. 그와 동시에 한 편으로는 '굳이 이렇게까지 표현해야만 했나?'라는 생각도 있었다. 왜 다리로 떨어져서 결국 머리를 치는 장면을 굳이 연출하고자 했을까. 근데 사실 뒤에 나오는 장면들을 감안해보니, 이런 장면들이 아리 애스터가 의도하는 공포 영화라는 장르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실제로 스웨덴의 풍습 중에 능력이 다 된 노인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것과 죽지 않으면 망치로 치는 것이 유사하게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제대로 묘사된 장면들 없이 그냥 그대로 흘러갔다면 너무 심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이 영화는 충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대니' 역의 플로렌스 퓨

 '절벽'까지는 대니의 위기를 나타내었다. 사실 그 이전에 이 마을에 도착한 대니가 어떤 물을 마시고 나서 나무 밑에서 쉬고 있을 때 잔디가 손등에 자라있는 모습을 연출한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이 나중에는 발등에도 한 번 더 보여진다. 이 장면들은 대니가 이 환경 즉, 이 마을에 적응할 것이다와 이 마을에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를 보여주는 장면이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절벽'씬과 같은 위기가 있어야 했고, 이런 요소들은 대니를 일단 관객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대상으로 여기게 만들어 놓은 듯 하다. 그리고 나서 자주 보여지는 자살한 동생, 그리고 절벽 밑에서 똑같이 죽어있는 가족이 보여지는 장면 등 대니가 처한 상황을 자주 보여주면서 대니가 이 마을에 동화되어가는 모습들을 관객들에게 이해를 시키는 노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과정 역시 이 영화가 <유전>에 비해서 굉장히 친절한 면이 많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 인물들도 빼놓을 수 없다. 무작정 말 한마디에 축제라고 쫓아와 봉변을 당하는 장면들을 끊임없이 보여주는데, 사실 주변 인물들은 처음부터 대니와 상반된 마인드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절벽' 이후 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어했던 대니와는 다르게 최고의 논문거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있었던 크리스티안과 조쉬, 그리고 '경전'이라고 칭해지고 있던 책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하며 관심을 갖고 있었던 마크가 그 예이다. '절벽' 다음 날 떠나려 했던, 잉마르가 데려온 외부인 코니와 사이먼이 예외였는데 이 마저도 떠나는 데 차질이 생긴다. 약혼자였던 코니가 본인을 놔두고 먼저 떠났다는 소식을 호르가 사람들에게 들은 사이먼은 그럴리가 없다며 애써 부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호르가 사람들이 어떤 부족인지 모르고 그냥 곧이 곧대로 이 영화를 보고 있던 관객들은 '왜 떠났지?'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코니가 그렇게 처참하게 당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떠난 줄 알았던 코니를 쫓아 떠났던 사이먼 마저 호르가 사람들에게 잘 갔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는 장면까지 나오면서 이 두 인물은 그렇게 떠나 잊혀지나 싶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신성한 장소에 소변을 보고 호통을 받은 마크도 어떤 소녀에 의해 끌려 가게 되는 장면까지 나온다. 여기까지 벌써 세 인물이 영화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그 날 저녁에 몰래 경전을 카메라에 담으러 간 조쉬의 최후가 여태 사라졌던 모든 인물들의 행방을 어느 정도 알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조쉬는 '절벽' 때 행해진 똑같은 방법으로 머리에 해머를 맞고 죽게 되고, 그와 동시에 마크의 가죽을 뒤집어 쓴 듯한 한 인물이 죽은 그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까지의 과정에서 처음 나온 그림 떡밥 중 한 파트가 풀린다.


 제일 앞서 가고 있는 펠레는 피리를 불고 있는데, 이는 '피리부는 사나이'를 연상케 한다. 이 인물은 쥐와 아이들을 '죽음'과 '실종'으로 이끌었다. 이 묘사로 펠레에게 최종적으로 '피리부는 사나이' 같이 선이냐 악이냐의 명확한 확답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감독은 단순히 이 그림을 통해 펠레가 나머지 넷을 '데리고' 간다는 의미가 아닌 죽음과 실종을 담은 '유혹'의 의미를 담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확실히 이해가 되고 소름이 돋는 요소였다.

 그리고 뒤따라서 마크 - 조쉬 - 크리스티안 - 대니 순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묘사했는데, 이는 대니를 제외하고 죽음의 순서를 나타내었다. 제일 먼저 실종된 마크는 그림에서 '광대'의 옷을 입고 있는데 이는 초대된 외부인들이 모여서 호르가 사람과 얘기하는 모습에서 뒤에서 춤추고 있는 모습을 '광대 가죽 벗기기'라고 묘사하는 장면과 연관지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조금 억지스러운 설정이라고 보는 관점도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굳이 손 잡고 빙글빙글 돌며 즐겁게 춤을 추는 모습에 암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광대 가죽 벗기기'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단순히 암시만의 문제였다면 나 같은 경우에는 너무 억지였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를 뒤따르는 조쉬는 책을 잔뜩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역시 '경전'이라는 책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찍지 말라던 사진을 찍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요소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 더 건져보면, 마크와 조쉬의 죽음은 어느정도 연관성이 있다. 조쉬의 죽음은 고목나무에 소변을 본 장면과 연관지을 수 있는데, 마을 사람이었던 울프가 호통을 치며 '조상을 욕보였다'라는 말을 한다. '절벽'에서 죽은 두 노인을 태우고 남은 재가 여기에 뿌려지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으며, 이 묘사로 볼 때 그 전에 죽은 사람들은 바로 화장을 진행했고 재를 이 고목나무 밑에 뿌렸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조쉬의 죽음은 '경전'과 연관되는데 근친혼으로 태어나 '예지력'을 가진 루벤이라는 소년의 그림이 이 경전의 줄거리로 쓰인다는 말이 나온다. 즉, 이 경전은 진행되어질 <미드소마> 축제의 지침서가 된다는 말도 된다.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던 호르가 사람의 말을 거역하고 사진을 찍으려 했던 조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둘은 결국 호르가 사람들에게 '침범'의 의미를 던졌고, 호르가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생각했던 과정들이 이 둘에게는 악을 벌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절벽'의 신성한 죽음을 상징했던 나무 망치는 조쉬의 죽음에, 즐겁게 추던 춤의 명칭이었던 '광대 가죽 벗기기'는 마크의 죽음에 쓰였다. 같은 행위 다른 의미였다.


'크리스티안' 역의 잭 레이너

 

 사실 제일 불쌍했던 인물은 크리스티안이라고 모두가 생각할 듯 싶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고통의 연속을 거치면서 마지막에 의도치 않은 관계를 맺기까지 했으며, 최종 마무리는 곰가죽을 뒤집어쓰고 불에 타 죽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 불에 타 죽는 것도 영화에서도 타 인물에 의해 묘사되듯이 천천히 고통스러운 요소이다. 몽롱한 크리스티안은 그 고통도 모른 채 천천히 죽어나갔다.

 외부인들이 산책을 하는 과정에서 친절한 <미드소마>는 세 가지 요소를 거의 한 번에 보여준다. 철창에 갇혀있는 곰, '암시에요! 봐주세요!'라고 친절하게 쭉 훑어지는 길게 그려진 그림, 그리고 거들떠도 보지 말라는 노란 정사면체의 구조물. 영화가 다 끝나고 보니 이 세 요소가 모두 크리스티안과 연관되어 있었다. 특히 친절하게 '과정'이라고 묘사된 그림이 있었는데, 이는 '마야'라는 인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그 그림을 따라가는 카메라 워킹을 보면 선정성을 제외하고 한 5살 정도 되는 아이여도 해석이 될 만큼 매우 친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누가봐도 앞으로 이 의식 혹은 행위가 묘사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었다. 그 그림을 이 영화와 접목시키면 마야가 크리스티안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의 음모를 넣은 음식과 생리혈을 넣은 음료를 크리스티안이 먹게 되고, 사랑에 빠진 크리스티안은 마야와의 관계를 통해 아이를 갖게 한다라는 내용이 된다. 호르가 마을에서 논문의 소재로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크리스티안은 근친상간이 있던 적이 있냐고 물어보는데, 그에 한 호르가 사람이 "사촌간은 있었으나 근친상간은 금기시하고 있다. 그래서 외부인들을 초대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이걸 물어보는 인물도 크리스티안. 감독은 한 사건에 대한 모든 연결고리를 정직하게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에게만 연관을 지어놓았다. 적어도 제 3자까지는 넘어가지 않는다.

 그 다음 장면으로 호르가 사람들이 대니와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나오고, 이는 그림에 묘사된 음식과 음료와 연결된다. 굳이 대니에게 음식을 같이 만들자고 하는 요소 역시 크리스티안과 연관성이 깊어보인다. 이어서 차려진 식사에 크리스티안의 음료만 색이 살짝 붉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음식을 먹던 크리스티안의 입에서 마야의 음모가 발견된다. 이미 크리스티안은 그림의 절차를 밟고 있었고, '광대 가죽 벗기기' 때 크리스티안을 발로 툭 건드리며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암시한 마야가 영화 후반부에서 벌어지는 크리스티안의 관계 상대가 된다. 어찌보면 크리스티안의 상대가 마야이기보다는 마야의 상대가 크리스티안인 것이 맞는 것 같다. 이 관계가 끝나고 불에 타 죽기 전까지 크리스티안은 마치 마약이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뭔가를 먹고 마시고 들이킨다. 스크린 밖의 나는 끊임없이 왜 마시냐고 묻고 있었지만, 영화는 언제나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영화가 아니었다면 이미 수많은 사건을 눈으로 본 자가 저렇게 별 의심없이 먹고 마셨을까?


'마야' 역의 이사벨 그릴


"오, 아기가 느껴져요!"



 <미드소마>에서는 개인적으로 총 세 번의 고비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등장인물에 부여된 고비가 아닌 관람객에게 적용되는 고비를 말한다. 그 중 특이성 넘버 원이었던 이 장면은 최고의 명대사를 낳기도 했다. 도대체 이런 대사는 어떻게 생각해낸걸까. 영화와 함께한 나의 짧은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이토록 신선한 충격을 주는 대사는 거의 처음이라고 느꼈다. 헛웃음을 내뱉어야 할지, 인상을 찌푸려야 할지, 아니면 감탄을 해야 할지 정말 무슨 감정을 대입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이미 이 행위가 진행되는 공간 내의 모든 상황이 너무너무 기괴했지만, 이 대사가 정점을 찍었다.

 그렇게 나체로 뛰쳐나온 크리스티안은 숨을 곳을 찾다가 어느 헛간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 이미 떠났다고 생각했던 코니가 허파가 밖으로 나온 채로 공중에 매달려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이 장면이 개인적으로 느꼈던 세 번째 고비였다. 물론 이미 세팅(?)된 장면을 보여준 것이기에 충격이 덜 했지만 나 포함 배경지식이 없는 관람객에게는 정말 기괴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역시 그냥 쓸데없는 연출이 아니었다. 과거 스칸디나비아 반도 즉, 현 스웨덴이 있는 지역에서 바이킹(노르만)이 행했던 종교적 처형 중에 '블러드 이글'이라는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이 처형법의 과거 유무가 정확히 밝혀진게 없다고 하지만, 만약 있었더라면 정말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블로도른', 영어 표기로 '블러드 이글(blood eagle)'은 대상자를 엎드리게 한 다음 날카로운 도구로 갈빗대를 척추에서 떼어내 하나씩 뽑아내고, 그 위에 허파를 끄집어내는 처형법이다. 근데 더 충격적인 것은 허파가 움직이는 장면을 영화에서 봤듯이 '블러드 이글'은 즉살 처형이 아닌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이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더 오래 살아있으라고 소금 뿌리기까지 했다고 하니, 과거 처형법은 정말 알아갈수록 잔인함을 넘어 끔찍하고 이해하기 힘든 방법들이 많은 것 같다. 또, 그 장면에서 눈에 꽃을 꽂아놓은 모습까지 같이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바이킹이 가죽을 벗겨놓고 가장 잔인하게 '적'을 죽이는 방법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기 전에는 '감독 사이코패스 아니야?'라고 생각했다면, 다 끝나고 일부 해석을 보고 나서는 '정말 꼼꼼한 영화이구나.'를 연발하며 감독에게 무언의 사과를 날리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여기


§<미드소마>의 두 가지 해석

 <미드소마>는 결국 외부인들 중 대니만이 호르가 마을에 살아남은 채 마무리가 된다. 그토록 잘 웃지 못했던 대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마지막에 비치는데, 이 장면에서 느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대니에게는 '의지'의 대상이 필요했고, 항상 의지가 되어주지 못했던 크리스티안을 희생자로 지목하여 결과적으로 대니가 크리스티안이 죽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데 이는 의지의 대상이 '크리스티안'에서 '호르가 마을'로 넘어감을 의미했다. 즉, 5월의 여왕이 되기까지만 해도 그저 축제만을 즐기고 있던 대니였지만, 지속되는 호르가 사람들의 공감과 설득이 대니를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게 만들었고, 게다가 마야와의 관계까지 목격한 후 그에 따른 절규를 함께해준 호르가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고 공감해주는 대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아마 여기가 대니의 확신이 서는 포인트가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결국 손등과 발등에만 풀이 자랐던 대니의 온 몸을 꽃이 뒤덮은 장면을 통해 '난 이미 여기 사람이에요.'를 말해주었다.

 이렇게 볼 때 <미드소마>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해진다. 단순히 외부인들이 호르가 마을로 따라 들어와 희생을 당하고 대니 혼자 마을에 스며든다는 설정 뿐만 아니라 조금 더 크게 바라보면 '대니'와 '크리스티안'의 이별을 다룬 영화가 되기도 한다. 이미 영화 초반부터 이 둘의 사이는 위태로웠다. 크리스티안에게 의지를 많이 하고 있던 대니에 비해 권태기 때문에 수차례 이별을 고민하는 크리스티안의 모습이 초반부에 그려지는데, 이 스웨덴 여정으로 이 둘의 관계 회복의 목적을 담았더라면 충분히 가능도 했을 것 같다. 근데 이 영화는 로맨스 장르가 아니었다. 초중반까지는 꾸준히 서로를 보듬어주는 듯 하더니, 마을에 동화되어가는 대니와 마야에게 유혹당하고 있는 크리스티안을 연속해서 보여준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영화와는 다르게 이 여정은 둘의 사이를 더 벌려놓는 계기가 되고, 결국 관객은 한 쪽은 죽고 한 쪽은 웃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있을 때 잘하자.'를 매우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끝으로

 영화 자체가 많이 기괴하다. 오컬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 영화가 안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나같이 오컬트 영화나 이런 고어틱한 영화를 자주 접하지 않았고, 그만큼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도 괜찮게 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생각보다 광범위한 장르적 해석이 가능하고, 여기저기 묘한 매력을 숨겨놓았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끌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난 결과적으로 불호보다는 호에 가까웠었고, 주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별로였다는 평이 많았다. 내가 본 영화 중에 제일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렸고, 보다가 껐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아리 애스터 감독은 약간 쿠엔틴 타란티노, 마틴 스콜세이지같은 호불호가 갈리는 감독의 반열에 올라와 있는 듯 하다. 근데 내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타란티노는 호, 스콜세이지는 불호에 가까웠고, <유전>과 <미드소마>를 거친 나에게 아리 애스터는 '호'로 다가와있다. 4시간짜리 영화를 이미 구상해놓았고 만들 예정이라고 하니 그것마저 매우 기대가 되고 있다. <미드소마>가 호로 다가왔으니 그 영화도 어찌됐던 호로 다가올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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