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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밥값

ㅡ 이하

위대한 밥값​
이하

벼를 베고 난 논바닥은
수염을 깎은 듯 말쑥하다.
이삭줍기는 들새 몫이어서
북반구 늑골을 마구 쪼아대는 바람에
간지럼 타는 지구는
예나 지금이나 어슷하게 돌아가지만
오월 가뭄 봇물 싸움이나
낟가리 풍경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그간 나라가 꿈만 같던 선진국이 되었는데
쌀을 팔아서가 아니라
가전 팔고 칩 팔고 탱크도 팔아
그 값으로 직불금을 주고 수매도 한다.
간혹 미제에 미사일 몇 개 더 사주더라도
쌀 개방만은 손사랫짓 해 온 이유는
겨레의 천 년 가업이 나락 농사여서다.
볍씨 한 알에 열 개의 이삭이 나고
백 개의 알곡이 한 이삭에 맺히어
천 배로 불려주니
논바닥에서 채굴하는 비트코인이다.
그런데 모를 일이
부지런한 농사꾼 아버지는
왜 남루하게 살았을까?
어느 유튜버가 밥 한 공기의 밥알을 세는 걸 보고
나도 유레카 한 게 있다.
쌀밥 한 그릇에 사천오백 개 밥알이니
하루 끼니로 십만 개 이삭이 될 밥풀을 먹은 셈이다.
밥이 위대한지, 그 밥을 먹은 내가 위대한지
오늘은 그 밥값이나 했는지
하루 볏가리 하나씩, 달마다 들판을 먹어
주름을 편 아랫배를 내밀고
삿대질로 밥값보다 꼴값하는 뉴스를 들으며
절로 선진 국민이 된 나는 끼니마다 식곤증에 든다.


* 이하/ 시인, 시조시인, 조각시 창시, 세종문화예술대상 수상, 시집 『하늘도 그늘이 필요해』 『스무 살의 사랑은 창을 닮는다』 『지식인의 글쓰기』 외 저서 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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