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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시로바로앉는여자 Feb 09. 2024

복 짓는 마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의 마법

올 겨울 몇 번째 독감이지 모르겠다. 의사도 이런 경우 드물다며 놀라워했다. 나도 비루한 신체가 놀라울 지경이다. 무너진 면역력을 일으켜 세워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독감 3일 차 열도 내렸고 설이 코앞이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카의 아가돌선물과 양가 부모님 선물을 사러 마을버스를 타고 나왔다. 백화점에 사람들이 많진 않았다. 아무래도 물가가 너무 오른 탓에 백화점에서 쉽게 선물을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백화점의 8층이나 9층에 있는 아기용품 매장을 십여 년 만에 구경한다. 작고 예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무너진 면역력만큼이나 낙담한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가윤이가 아기라면 여기 있는 옷 다 입혀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매장에서 바지 하나와 카디건 하나를 골랐다. 눈에 띄는 세트를 선택하고 " 얼마예요?" 하고 물었는데 바지 하나에 52000원이라고! 귀를 후비고 재차 "그러니까, 이 바자 한 장이 52000이라고요? " 마음의 소리가 나와버렸다. 

나의 바지 가격 상한선이 5만 원인데 요즘 아기 옷이 무척이나 비싸네요.라고 할 말 안 할 말 다해버렸다. 점원은 나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지며 억지미소를 살짝 보였다. 옷을 사지 않을 손님이라고 판단할 찰나에 나는 또 진정한 손님이 되었지. 

"상하의 10만 원에 맞춰주세요. 하의 저렴이로 골라주시면 되겠어요. 키워보니 남자아이 하의는 막힙혀도 되겠더라고요 "  레깅스가 세트로 맞춰진 아기옷선물이 포장되었다. 사고자 마음을 먹으면 순식간에 소비하는 빠른 판단력이 나의 큰 장점이다 단점이다. 이것 재고 저것 재고하지 않는다. 

"작고 예쁜 것들은 늘 옳아요. 사랑스러운 것들을 보고 일하시니 다른 매장보다 마음은 좀 좋으시겠어요 

저는 이런 물건들이 힐링이 되더라고요"  나의 TMI감정고백에 점원분의 인상이 한껏 너그러워졌다. 

"매출만 아니면 직업 만족도 매우 높아요. 요즘은 힘들거든요 "

"특별한 날에 오게 되더라고요 백화점 아기용품 매장은. 예쁜 것들 보며 돈 많이 버세요" 

"새해에 복 진짜 많이 받으세요 사모님" 

쿨한 소비였다. 

합리적인 소비는 아니었으나 다시는 오지 않을 조카 아가의 돌선물이니까. 


점원분의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나의 뒤통수에 메단 채로 지하 1층으로 갔다. 비싸다고 소문난 올겨울 과일을 살 차례다. 과일 선물상자 앞에서 한참을 어슬렁거렸다. 곶감을 사야 하는데 몇 개 안 든 상자 앞에 작디작은 숫자를 확인하려고 소심하게 다가가서 가격만 확인하고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점원이 말 붙이면 난감해하며 슬쩍 지나쳤다. 포장지를 벗기고 낱개를 큰 접시에 모아보면 저 곶감들은 분명 개수가 형편없이 적을 텐데 12만 원이나 했다. 곶감 자신이 생각해도 본인의 몸값에 몸 둘 바를 모를 것 같은 가격일 것이다. 

합리적인 소비가 전혀 아니야를 외치며 돌아 나오는 길에 영등포 과일도매가게를 지나가며 곶감선물상자를 발견했다. 여기서는 분명 제값을 잘 받겠지.  

"이 선물 세트 얼마일까요?"  주인어르신은 연신 비쌀 텐데 비쌀 텐데.. 말하시며 가격을 몰라 한참 장부를 찾으셨다. 오호 양도 많은데 가격은 절반이다. 

"상주 곶감 맞지요?" 

"그럼요. 요즘 잘 안 나가서 이렇게 비싼 건. 2개만 갔다 왔어" 

"이거 주세요!"

굉장히 빠른 소비였다.

환한 미소로 행동이 재빨라진 주인어르신

"아우 내가 낼모레 70이라 기억을 잘 못해. 가격도 모르고 판다고... 미안해요" 

"저도 그런데요 뭐. 누가 70이라고 보겠어요. 사장님. 곱고 젊어 보이셔요"

행복한 표정에 정말 하이톤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밭을 껴" 


오한이 돌며 독감기운이 다시 올라왔다. 빠른 발걸음만이 살길이다.

두 번째 복인사를 매단 채 열심히 걸었는데 밀려오는 인파에 어르신이 필라테스 전단지를 나눠주고 계셨다.

저 전단지 모두 뿌려야 어르신이 퇴근하실 수 있다. 손을 뻗어 냉큼 전단지를 먼저 낚았다.  

"아우, 고마워라.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나는 기억한다. 저 어르신은 동네에서 출퇴근 시간에 전단지를 나눠주는 알바를 자주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설연휴 전날인데 애쓰셨다. 어르신이 더 복 받으시길 진정으로 바라며. 


집에 와서 바로 누워 생각해 보니 잠깐 사이에 복 받으라는 인사를 많이도 받았다.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조금은 봉긋해졌다. 좋을 말은 힘이 있으니까.

말 하나에 친절, 행동하나에 진심 이런 것들이 굉장한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필요에 의해서 돈을 주고 물건을 샀을 뿐이며, 그 과정에서 마음의 소리를 입을 열어 전했을 뿐이다. 그냥  설 앞두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상대편의 진심이 전해지는 진짜 복 짓는 마음이 느껴졌다.

복을 짓고 사는 게 그리 어려울 일은 아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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