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는 것은 의외로 세월이 지나며 그 기준과 정의가 크게 바뀌는 개념이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함께하는 내 또래의 모든 이들이 친구이다. 그 시절의 우리에게 친구는 말 그대로 '함께 놀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외에는 다른 구분이 없다. 그 시절의 친구의 범위는 가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부모님의 친구와 지인들, 그들의 자녀들이 곧 나의 친구나 다름없다.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상의 기준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유치원을 지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친구의 개념이 좀 더 확장된다. 가정의 틀에서 벗어나 같은 지역에 존재하는 또래가 친구의 범위가 된다. 가정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우리는 친구라는 범위 안에서도 각각의 친밀도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더 가까운 친구, 나와는 덜 가까운 친구. 그리고 그저 함께 웃으며 놀던 시절에서 벗어나, 더 가까운 친구와 서로 고민을 이야기하고 추억을 공유하며 비밀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이 추억과 비밀이라는 것이 우정에 있어서 참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추억과 비밀은 나와 그 친구만이 공유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그 친구를 차별화해 주는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되며 친구의 개념은 또 한 번 바뀌게 된다. 같은 지역에서 자라오며 비슷한 환경과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에게서 벗어나,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오던 사람을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스케줄을 보내던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달리, 각자 다른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고 공간의 제약도 벗어나 정말 나와 다른 너무 많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독특한 점은 친구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얕아지고, 동시에 좁고 깊게 변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덜 친한 친구의 범위는 정말 한없이 넓어지면서 동시에 아주 얕은 관계를 갖추게 된다. 이 시기부터 '지인'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친구라고 부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와 정말 마음이 맞고 마치 영혼을 공유하는 듯한 소수의 진짜 친구를 만나게 된다. 요즘 말로는 '찐친'이라고 부르는 이 친구들은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관계가 발전하는 경우도 있고, 대학시절 새롭게 만난 인연이 발전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무엇이 되었던 이 시기의 '찐친'이야말로 정말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학교라는 틀에서 온전히 벗어나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순간, 친구라는 개념은 마지막 진화를 맞이한다. 덜 친한 친구들과는 점점 교류가 줄어들며 인연이 끊어지거나, 말 그대로 '지인'이라는 관계로 남아버리게 된다. 사회생활을 거치며 그저 아는 사이이기만 한 '지인'은 점점 많아진다. 그와 동시에 진짜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하나 둘 사라져 가곤 한다. 때로는 크게 다투어서, 혹은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져서,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 무엇보다 연애를 시작하고 각자 가정을 이루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친구보다 더 마음을 쏟는 대상이 생기게 되는데, 이 시기가 친구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가장 흔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간들 속에서도 여전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남게 된다. 친구였던 수백 명의 사람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열 명 남짓. 그제야 우리는 그 사이에서 우정의 의미를 발견하곤 한다.
좋은 친구란 무엇일까?
최근에 읽은 쇼펜하우어의 글에서, 쇼펜하우어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과 우정을 맺어야 한다고 한다.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고,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그런 뛰어난 사람. 그리고 때때로 그런 뛰어난 친구의 그늘에 가려질 것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그만큼 뛰어난 사람을 친구로 두어야 한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들으며 의문점이 생겼다.
내 친구들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데..?
그러면 내 우정은 별로인 건가..?
나는 뛰어남을 우정의 기준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애초에 뛰어난 사람과 우정을 맺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논리대로라면, 나보다 뛰어난 그 사람에게는 나는 뛰어나지 않은 사람 아닌가? 그렇다면 이 우정은 일방통행일 뿐이다. 덜 뛰어난 쪽만이 뛰어난 자를 친구라 여기고, 뛰어난 자는 덜 뛰어난 자를 친구로 여기지 않는, 일방적이고 기생적인 관계가 친구가 된다. 그러니까 뛰어남을 우정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우정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나의 몇 안 남은 친구들을 돌이켜보며, 내가 그들을 소중한 친구라고 여기는 이유를 생각해 보며, 나는 그 기준을 찾을 수 있었다. 친구는 '서로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다.
내가 친구를 떠올릴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이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지켜봐 주었고
나의 못난 모습도, 내가 무언가를 해내는 모습도 모두 지켜봐 온 친구들.
그 긴 시간 동안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변치 않는 신뢰를 보여준 친구들.
그들은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인정해 주었고, 그 가치만큼 나를 대해주었다.
아무런 가치가 없어도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이?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자애일 뿐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자애를 베풀 수 있을 수도 있을지언정
나는 그 자애가 하나도 반갑지 않다.
나는 나의 친구들에게 일방적으로 아껴주어야 할 대상이고 싶지 않다.
그들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고 싶으며
그들이 나의 가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중국 속담 중에는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해내존지기 천애약비린)이라는 말이 이다. 이 세상에 나를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면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이웃과 같다는 말이다. 나를 알아봐 준다는 것. 나의 가치를 인정해 준다는 것. 그런 친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안을 받고 힘을 얻는다.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친구는 자연스럽게 나를 가치 있게 대한다. 그 또한 나와의 만남을 기뻐하고, 나와 같은 친구가 있음에 즐거워하며, 나로부터 많은 것을 얻곤 한다. 그 친구의 모습들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이다.
반면,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지 않는 친구에게 나는 무수히 많은 별 볼 일 없는 사람 중 한 명이 뿐이다. 딱 그 정도의 가치로만 나를 대할 뿐이다. 그에게 나는 전혀 소중하지 않으며 나는 그에게서 비관과 자괴감만을 얻게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친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한 친구들 만이 내 주변에 남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그 친구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이것은 나를 위해서도 그 친구를 위해서도 가장 필수적인 것이며 어쩌면 건강한 우정을 갖추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선결과제와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나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가치를 평가하지 못한다면, 나의 가치를 타인의 평가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타인이 규정짓는 것이며, 타인이 나라는 사람의 점수를 매기고 나의 옳고 그름을 채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를 평가하는 타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며, 타인에 의해 주어지는 명예와 체면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이는 우정을 갖추기에도 좋은 상황이 아닌데, 친구들이 나를 볼 때에 어떤 가치를 알아봐야 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가치를 찾아내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나 또한 나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타인이 나의 가치를 찾지 못하면 스스로가 가치 없는 사람으로 생각되며, 친구들이 찾아내어 말해준 그 가치에 목을 매게 된다. 나의 삶은 그저 타인에게 가치 있어 보이는 것에 집중하게 되고, 타인이 말해준 그 가치를 지키는 것에만 몰두하는 삶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제대로 보고 평가하고 있다면, 나의 평가가 곧 나라는 사람에 대한 답이 된다. 기준점이 더 이상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확고하게 세워져 있는 것이다. 타인의 평가는 그저 나에게 제출된 답안지에 불과하다. 그것을 채점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 사람은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이 사람은 나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내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 가치를 못 알아보는 사람들에게는 실망할 뿐, 나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을 수 있다. 나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힐책들도 그저 빵점짜리 답안지로 여기며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평가한 나 자신의 가치가 확고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아봐 주는 친구들이 더없이 귀하게 여겨진다. 만점짜리 답안지를 제출한 학생을 바라보는 교수님처럼 말이다.
다시 한번 돌이켜보자.
나는 나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파악하고 있는가?
나의 친구들은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있는가?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있는 것인가?
오늘은 나의 가치를, 그리고 내 친구들의 가치를 떠올려보자.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