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살아가는 방법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 막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의 질문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의 질문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어느 순간에. 좀 더 멋진 삶을 살고 싶은 그 순간에. 그럼에도 무엇을 해야 잘 사는 것인지를 도저히 모르겠는 그 순간에. 이러한 질문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대체 무엇을 해야 나는 잘 사는 것일까?'
그 질문의 순간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경험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너무 순탄하고 쾌적한 삶이 주어진 덕택에 고민의 이유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괴로울 정도로 고난과 역경이 지독하게 닥쳐오는 삶을 살아가는 탓에 고민의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고민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고민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한 해답지와 같은 사람을 이정표로 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순간에 저 질문 앞에 고민하게 된다. 사회적 통념에 따른 보편적인 길을 걷던 와중에 문득 자신만의 삶에 대한 고찰에 빠져드는 그 순간에, 혹은 오랫동안 이어지는 기나긴 나태한 삶의 끝자락에서 이대로 괜찮은지에 대한 의문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에, 혹은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나의 미래가 불안해지는 그 일렁임의 순간에, 혹은 나의 삶이 그리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마음속에 깃드는 그 먹먹한 순간에. 바로 그 고민은 찾아온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만약. 지금 당신이 그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면, 혹은 그 질문을 예전부타 마음에 품어오고 있다면,
지금이 바로 '당신만의 공식'을 찾을 때이다.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들은 표면과 본질이 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매우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은 유독 어렵고 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표면적인 의미에 대해서라면 답은 이미 주어져있다. 학문적 의미라면 건강을 유지하며, 생존에 필요한 유지비용을 위해 노동을 하고, 그 대가를 통해 삶을 유지하면 된다. 사회적 통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착실히 돈을 모으고, 좋은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면 된다. 이 통념이 구시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식이나 코인, 부동산 등을 통해 돈을 한껏 벌어들인 다음 금전적인 걱정이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요즘의 사회적 통념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 대답에 충분한 만족을 하고 삶의 지침으로 삼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만족이 되지 않는 답일 것이다. 그것은 저 질문이 가지는 본질이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저 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나라는 존재의 특별함'을 원하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답을 원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질문 역시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아니라 '나'에 대해 의문점을 가져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오래된 철학적 질문이다. 그만큼이나 매우 난해하면서도 매우 식상하다. 막상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면,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들곤 한다. 오그라들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다. 그런데, 오그라드는 거부감도 잠시 억누르고, 막막하더라도 시간을 들여 잠시 고민해 보아도 의외로 답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괜찮다.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나라는 사람을 그렇게 쉽게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절망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단편화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질문을 좀 더 좁혀볼 필요가 있다. 처음의 고민은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잘 사는 것일까?'였다. 그렇다면 굳이 나라는 존재 전체를 규명할 필요는 없다. 알아야 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나를 반짝이게 만드는 것'. 그것만 알면 된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나를 반짝이게 만드는 것을 찾는 가장장 쉬운 방법은 기억을 뒤적여보는 것이다.
'내가 가장 생명력 넘치게 빛났던 순간은 언제인가?
물론 단순히 그 순간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순간 나는 왜 활력이 넘쳐흘렀는가. 무엇이 나의 심장을 그토록 뛰게 만들었고, 무엇이 나를 그토록 열중하게 만들었는가. 나는 왜 그것에 빠져들었는가. 수많은 꼬리질문들을 뒤이어 던져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 반짝이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언어화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활력의 공식을 하나 얻는 것이다.
8년간 쉬지 않고 일했던 직장을 퇴사한 후 4개월을 쉬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일해온 나를 위해 휴식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었다. 쉬는 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일도 하고,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않았던 일들을 많이 해보려 했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아니 한심할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글조차 겨우겨우 뜨문뜨문 썼다. 휴식을 가지는 4개월간은 내 삶에서 가장 생명력이 없었던 시간이었다.
4개월 전까지만 해도, 쉼 없이 살아온 나의 삶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잠시 몸과 영혼을 쉬게 해주는 시간, 잠시 자신을 돌이켜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시간은 나에게 나태함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휴식은 오히려 활력을 빼앗아갔다.
'휴식 = 새로운 활력'이라는 공식은 나에게만큼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나는 나를 그토록 몰랐던 것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마자 눈에 뜨일 정도로 삶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람들은 바로 인지할 정도의 변화였다. 시간이 넘쳐흐를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부족해지니 시간을 쪼개어 쓰기 시작했다. 나에게만큼은 '적당한 바쁨 = 활력과 의욕'이라는 공식이 성립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찾았다. 정확히 말하면 하려던 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이것은 나만의 공식이다. 그 누구에게도 '일을 좀 하면 오히려 활력이 돌 거야' 혹은 '쉴 때는 오히려 아무것도 못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르다는 것은 바로 이럴 때 적용되는 말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먼저 당신의 지난 시간을 언어화하고 공식화해볼 것을 권한다. 그 안에서 당신을 빛나게 만드는 공식을 찾아낸다면, 지금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반짝이는 모든 순간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