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z Feb 25. 2022

우울과 허무의 상품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0대 말 노량진의 헌책방에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샀다. 표지의 색과 제목이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사춘기의 호르몬에 휘둘리며 자취, 연애나 수능 등의 이벤트를 치뤄내느라 가장 바빴다. 아마도 10대 말은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일 것이다. 그 시기에 만난 이 책은 나의 정체성에 지대하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20대 초까지도 전혜린은 비운의 천재로 나의 어떤 이상적인 여성상 같은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녀를 말할 때마다 나는 남들이 모르는 어떤 멋진것을 아는 특별한 취향을 가진, 또래보다 지적으로 성숙해서 남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하는 그런 문학소녀가 된 기분을 느끼곤 했다.




21살, 아직도 유럽에 대한 어떤 로망이 있던 시기에 프랑스 문화에 대한 강의를 수강했다. 그 강의에서 여름에 한 달 정도 프랑스 리옹에서 어학 수업을 받는 코스를 알려주었고, 나는 주저없이 참여하게 되었다. 리옹의 여름은 아름다웠다. 프랑스의 정원 가꾸는 문화를 배우는 워크샵에서, 쏟아지는 햇볕을 받으며 자라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기억난다. 지역 마트에서 산 구운 닭과 감자도 맛있었다. 어학코스 중간 쯤이었던가, 코스에 참여한 학생들과 교수가 모여서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서 어쩌다 전혜린 얘기를 내가 꺼내게 되었다. 나는 "오, 그 작가를 아는 사람이 아직도 있군요."라는 식의 칭찬을 기대했다. 교수님도 실제로 그런 말씀을 하셨다. 다만 그 말이 이끄는 방향이 예상과 조금 달랐는데 "한계가 분명하고 그걸 넘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셨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무 충격적이라,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30대가 된 나는, 독일에서 만난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전혜린을 언급했다. 공교롭게도 내 나이가 전혜린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였다. 그는 전혜린에 빠져 그녀가 식사를 했던 카페였던가- 레스토랑을 방문하기도 했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그녀의 책을 다시 읽어보았고, 나는 교수님이 했던 그 말을, 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노량진에서 전혜린을 집어들 시기에는 적어도 우울과 죽음은 아직 일종의 금기 단어였다. 어느 순간부터 미디어는 자살, 우울, 정신병에 대해 거리낌 없이, 그리고 훨씬 많이 다루시 시작했다. 우울증 환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 우울할 때 듣는 음악, 가족이 자살한 사람 등. 그런 컨텐츠를 접하며 우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실은 그냥 헤어나올 생각이 없는 친구들이 많았다. 때때로 나도 그 중 하나였다. 평범하고 지루한 삶에서 우울은 나를 타인과 구분해주는 특별한 개성이거나, 자신의 삶에 서사를 부여하는 무언가, 혹은 지금의 무력함을 정당화하는 어떤 이유 등의 많은 기능을 수행했다. 우울이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


겪으리라 예상하지도 못했던 수많은 경험을 하며, 특히 독일에 살면서 어느 날은 '아, 이것도 이젠 재미가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울과 허무를 나의 일부나 정체성으로 여기는 게 재미없어졌다. 우울증은 말 그대로 그냥 정신병이고, 나는 이걸 아토피나 위염, 혹은 감기 비슷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우울에 젖어 죽음과 괴로움이나 무의미에 대해 말하는 게 딱히 멋있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충동, 모든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감정... 그런 말들은 기침이나 알레르기로 충혈된 눈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지금 전혜린을 읽으니 "한계가 분명하다"는 교수님의 말이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그녀는 자신의 병증을 자신과 분리하지 못했다. 그녀의 고통에는 정당한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육아 우울증, 산후 우울증이나 유년기에 겪은 부모님과의 문제라던가,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수많은 외재적인 이유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극복하기는 커녕, 자신의 일부로 삼고서는 그 이미지에 집착했다. 그렇게 보면 그녀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휘말려 스스로를 파괴해버린 비운의 예술가-같은 비장한 단어보다는, 그냥 유행병이나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라고 서술하는게 더 적절해 보인다.


사람 자체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그녀의 삶 전체를 매도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힘들 시기에 그녀의 책은 너무 많은 시간을 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독일에서 만나 전혜린에 대해 대화한 친구 또한 허무의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 수많은 검색결과들을 읽어보면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그녀의 저작물은 우울과 허무를 어떤 멋지고 낭만적인 것으로 포장한 뒤, 그것을 정체성으로 삼게 하는 좋은 도구이다. 정신적 자해를 조장한다.




우울증과 자살을 위염이나 장염같은 병이라고 여겨보자. 그런 병에 걸린 뒤, 소화를 못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며 일부로 몸에 안좋은 것을 먹다가 마침내 죽는 것이 안타까운 상황인가? 그냥 미련한 행동일 뿐이다. 소화를 못하는 괴로움을 털어놓거나 그 고통에 공감은 해줄 수 있지만, 굳이 담배와 술을 권하며 함께 병을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


요즈음의 문학 컨텐츠에서 보이는 문제가, 전혜린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문제와 같다. 읽고 나면 힘이 나는 게 아니라 힘이 빠진다. 그런 작품도 나름의 의미는 있지만, 너무 만연하다. 자기연민의 다양한 변주들. 고통과 괴로움, 정신병, 아픔에 대해 말하지만, 고통을 자아와 분리한 뒤 극복해내려는 시도는 보기 힘들다. 우울과 허무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엮어낸 뒤 스스로가 극복하지 못했던 그 허무를 부지불식간에 옮게 한다. 삶에서 회피하게 만든다. 감명받은 이들은 그걸 옮긴다. 좋다고 추천받아 읽어봤다가 그 뿌리깊은 황폐함에 우울증만 재발한 작품이 너무 많다. 좋아하는 책 컨텐츠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다루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것을 클럽하우스에서도 다루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광경인가? 너의 내면이 아름답게 황폐한 건 알겠지만 난 알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과학이나 실용서적을 읽는다. 그런 책들은 내가 정말로 삶에 발을 디디고 내가 직면한 문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뇌과학은 명상을 해서 머리를 비우거나, 운동을 하는 것이 내 기분을 정말로 어떻게 낫게 하는지 설득하고 방법을 제시한다. 경제서적은 가계부를 적는 법이나 투자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정리정돈에 대한 책은 기분을 산뜻하게 해준다. 이것들은 누군가와 함께 산책을 하고, 좋은 것에 대해 대화하면서 삶을 살아나갈 기억을 쌓을 소소한 힘을 준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비장하고 처연한 우울과 허무보다는 소소하고 별것 아닌 행복들로 삶을 채워나가길 바란다. 더 큰 고통이 삶에 닥쳤을 때, 행복의 기억은 단단한 벽돌이 되어 스스로를 보호할 담벼락이나마 쌓을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니까.




[미생]에서 두 발을 땅에 딛고서도 별을 볼 수 있는 거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별을 보기 전에 땅에 두 발을 먼저 단단히 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전혜린씨 고마워요.

나의 10대 시절에, 이렇게 힘든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주셨답니다.

작가의 이전글 유별난 성장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