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z Feb 21. 2022

유별난 성장통

좀머씨 이야기

 '좀'이라는 특이한 단어가 들어가서 읽어본 적은 없어도 제목은 모두들 아는 소설이다. 좀도둑, 좀벌레, 좀약... 좀이라는 단어는 사람 이름에 붙이기엔 참 독특하고 드문 단어라, 마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처럼 한 번 들으면 도무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소리들은 입에서 내내 맴돌다가, 다시 써보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한 누군가 입에서 결국 다시 내뱉어지고 그래서 잊어질 때 쯤 다시금 기억에 각인된다.


나 또한 [아마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과 함께 '잘은 모르지만 특이한 제목의 어떤 아저씨에 대한 특이한 소설'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서른이 넘고 독일에 와서야 좀머가 Sommer(여름)라는 뜻이란 걸 알게 된 뒤, 어쩐지 꽃 이름인 존넨쉬름(Sonnenschirm, 우산)처럼 사람을 허무하게 웃긴다며 책장을 들췄다.




좀머씨가 누구인지 혹은 작품의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저자 본인의 유년시절에 대한 자전적 소설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그 부분도 동의하지만, 거기에 조금 더 덧붙여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다.


내가 생각하는 좀머씨는 청소년기(주로 유년-사춘기를 중심으로 하는) 그 자체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주로 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갈 길을 하면서 '자신을 내버려 두라'고 말하는 모습과 어느날 갑자기 물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근거로 꼽고 싶다.


유년과 사춘기를 걸쳐서 사람은 부모와 사회가 건네준 가치관을 해체하고, 다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재정립하기 시작한다. 그 때 끊임없이 기존의 가치관이 자신을 교정하려고 할 때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나를 내버려 둬라, 나는 나의 방식대로 하겠다'가 아닐까? 방문을 잠그고, 궁금해 하는 부모님의 노크에 "아, 나 좀 방해하지마"라고 소리질러 본 경험은 대부분 있을것이다. 성장하는 소년/소녀의 모습과 좀머씨가 어쩐지 닮았다고 생각했던 첫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다.


이 소설이 성장소설, 그러니까 전형적으로 소년이 어른이 되는 소설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된 다른 큰 이유는 좀머씨가 어느 날 갑자기 물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모습 때문이었다. 내가 느낀 성장에 대한 이미지가 딱 이런 모습이었다. 나는 내가 단계적으로 어른이 될 준비를 했다기보다 어느 날 그냥 나는 이제 더이상 아이가 아니다, 소녀도 아니다 라는 것을, 어느날 그냥 알았다. 어떤 계기나 설명도 없이 나의 성장은 그냥 그렇게 완료되었다. 강아지가 자라 개가 되는 것 같은 선형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보다는 애벌레가 정신차려보니 잠자리가 되어있더라-류의 느낌에 가까웠다.


덧붙이자면 성장에 대한 느낌은 '내가 미성숙하다' 혹은 '나는 불완전하다'랑은 달랐는데,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격정적으로 만들었던 어떤 호르몬들이나 감정 상태가 사라진 것에 가까웠다. 나는 여전히 미성숙하고 불안에 떨었지만, 그것이 사춘기를 거쳐 20대 초반을 지배하던 그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제목이자 이름인 Sommer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여름,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성장하는 시절 말이다. Sommer에 대한 독일인들의 사랑은 좀 각별하다. 독일의 여름, 특히 저녁 5-7시 사이의 밝고도 적당히 선선하며 건조한 그 시기는 어둡고 습하고 기나긴 독일의 겨울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된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모든 공원은 집에서 뛰쳐나온 독일인들로 가득 메워져서, 어디서나 바베큐 굽는 냄새와 나체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집단적 환호를 보고 있자면, 마치 우울증 환자들이 어느날 갑자기 조증이 걸린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런 여름은, 옥토버 페스트를 하는 9월 말을 기점으로 별안간 끝나버린다. 그때가 되면 모두들 Jackwolfskin이나 Deuter 자켓(우리나라로 따지면 블랙야크나 노스페이스 정도 되는 브랜드)을 꺼내 입고 다시 긴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작가는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은 다소 음침해보이기까지 하는 인물에게 왜 좀머씨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아이러니한 느낌을 자아냈을까? 쥐스킨드의 소설 전반에 흐르는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이어서 도저히 남과 섞이기 힘들어하는 그 정서를 고려한다면, 아마도 다른 많은 해석들처럼 좀머씨는 작가의 분신인 것은 정말 맞는 것 같다. 남들이 그 화려한 여름의 태양에 취했을 때 혼자서 고독히 자신의 길을 갔던 어떤 소년 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화려하고도 평범한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쥐스킨트에 공감하는 예민하고 외로운 독자들, 세상에선 너 참 유별나다는 취급받곤 하는 이들에게, 그런 시절도 지나간다는, 어느 날 끝나더라라는 메세지 아닐까? 




어쨌거나 좀머씨는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관찰자이자 화자인 '나'는 자라서 청년이 된다. 대중 공포증이 있었다는 쥐스킨트도 결국 자신의 작품을 내놓음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세상과 교류하고 소통했다. 그러니 누군가가 이런류의 폐쇄적인 성장 과정을 겪고 있다면... 너무 걱정하지 말자. 여름은 때가 되면 지나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을을 맞게 될 날이 반드시 올테니, 타인은 그저 내버려 둘 것.


'Ja so laßt mich doch endlich in Friede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