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쳐에세이
여자 라는 두 글자
여자. 복잡하고 어려운 존재다. 나도 여자이지만 내 자신을 잘 모를 때가 많다. 이 땅에 태어난 여자들은 평생 이름 석자 이외에 엄마, 딸, 며느리 등의 수식어와 함께 살아간다. 이전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속 여성들에게는 '모성애' 또는 '남성에게 도움을 받아야만하는 약한 존재'로 설정값을 부여했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였고 요즘은 '동백'이와 '82년생 지영'이로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다. 여자들은 더이상 누군가의 소유물로만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림 속 여성의 설정값
당신이 떠올리는 그림 속 여성의 모습은 무엇인가. 고전회화 속 '여성' 의 모습은 다소 일방적이다. 탐미의 대상이거나 누군가의 뮤즈(Muse, 영감을 주는 대상)로 존재했기에 누드의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아름다운 오브제(Objet)로서 기능해야만 했다. 또한, 그림 속 여성들은 무언가를 들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주로 '거울'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그녀들의 '미'에 대한 열망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녀들 옆에는 '창문'도 존재한다. 창문 옆에 서 있는 여인,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여인, 몸을 내밀어 창문 밖을 쳐다 보고 있는 여인 등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더불어 하염없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그토록 바라보고 있는가. 단순히 '보는' 개념이 아닌 '바라' 보고 있다. 영어로는 see가 아닌 look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라보는 대상이 정확하지 않게 표현되는 경우도 많다. 중요한 건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이다
겨울과 잘 어울리는 수수께끼 같은 그녀들
고요하면서도 단호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여인들이 있다. 보고 있으면 그녀들에게 감정이입하게 된다. 그녀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를 알아내고 싶다. 수수께끼 같은 그녀들이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나약하고 여리여리한 존재로 그려졌느냐. 아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듯한 자태를 선보이며 그림을 지배한다. 그녀들을 만나보자.
그녀는 뒤돌아 서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살짝 기울어진 뒷태로 봐서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 왼손에는 트레이를 들고서 그녀는 '집' 안에서 무엇을 저토록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을까. 그녀의 뒷목에 빛이 들어와있다. 왠지 겨울볕일 것 같다.
이 그림은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작품이다. 함메르쇠이는 주로 그의 '집'을 탐험 무대로 사용하였고 그의 모델은 아내, 이다(ida)이다. 코펜하겐 Strandgade 30, 그들의 집에서 그린 것이다. 회색이 많이 섞인 푸르스름한 벽지와 하얀색 몰딩, 그리고 고동색 서랍장의 배치는 북유럽의 분위기를 물씬 자아낸다.
그녀는 창가 아래 빛을 받으며 편지를 읽고 있다. 누가 보낸 편지이길래 잠시 저 세상이 멈춘 것 같이 편지만을 바라보고 있을까. 살짝 고개를 떨구고 눈을 내리 깔고 있다. 밝은 얼굴이 아니다. 편지 속 내용에 안 좋은 소식이 담긴 것일까. 그녀가 입고 있는 푸른색의 느슨해보이는 옷은 그녀가 임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혼자 아이를 지켜내고 있는 여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창문이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이마와 옷에 햇살이 비추고 있어 창가 아래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을 이토록 자연스럽고 계획적으로 사용한 화가는 바로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베르메르'이다. 그는 여인들을 창가에 배치시켜 편지를 읽거나, 쓰거나, 뒤에서 멍하니 쳐다보는 등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여자는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창문에는 가게의 형광등만 반사된 채,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에 그녀는 왜 혼자 앉아 있을까. 그녀의 옷은 왠지 굉장히 따뜻할 거 같다. 장갑과 모자도 착용한 것으로 보아 겨울인 듯 싶다. 살짝 가려진 그녀의 얼굴이지만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외로워보이지만 결코 무너질 거 같지 않다. 그녀를 관찰하게 된다.
알랭드보통은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은 슬프고 외로워보이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라고 이야기한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슬픔과 고독함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에게 존재하는 슬픔을 치유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슬픔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의 감정에 덜 집중하게 만든다. 슬픔의 즐거움(The pleasures of Sadness)를 표현한 화가는 바로 미국의 '에드워드 호퍼'이다.
호퍼 또한 빛의 화가이다. 차갑게 멈춰진 듯한 여인의 형상은 빛과 그림자의 효과로 마치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들은 오.롯.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