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이방인의 전시여행법_제주 구도심편
제주 아트로드
제주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최고이자 최선의 여행지였다. 마치 그 때를 연상케 하는 요즘이다. 비행기로 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제주를 여행하는 법은 다양하다. 몇 년 전만 해도 미술 애호가들에게 일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자연친화적인 건축물을 따라 다니는 등의 아트투어가 유행이었다. 제주 아트 로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트렌드는 계속 변화한다. 웅장한 건물을 새롭게 짓기보다 기존의 건물을 재활용하는 도시재생의 바람이 불어왔다. 이 흐름에 발맞춰 한국의 씨킴(본명 김창일)은 제주 구도심의 폐 건물을 갤러리로 재생시키며 새로운 아트 로드를 새롭게 구축했다.
제주 구도심
속
뉴 아트로드
제주 구도심(원도심)은 과거 제주도청, 대학교, 상업 및 금융 관련시설 등이 모두 집중되어 있었고 패션, 쇼핑, 영화관 등이 즐비한 제주도 최고의 번화가였다. 하지만 원도심 외곽지역의 도시개발이 이루어지고 주요 행정기관과 교육기관의 이전으로 원도심과 신도심으로 이원화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중앙로, 칠성로, 탑동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원도심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ㅣ 탑동 바이크샵 ㅣ동문모텔
2014년 한국을 대표하는 컬렉터 CI.Kim 씨킴 (본명 김창일)은 폐 건물로 방치되어있던 탑동 시네마, 동문모텔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여 미술관으로 재탄생시켰다. 과거 건물의 쓰임과 기억,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는 서울에서도 쉽게 만나보기 힘든 국내외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오래된 건물을 보존하고 확장하여 화이트 큐브로 대변되는 현대미술공간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아트가 있는 곳에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 - 씨킴
제주 D&D
'D&DEPARTMENT PROJECT’는 2000년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가 창업한 스토어 기반의 활동체이다. 그들의 활동의 축이 되는 키워드는 '롱 라이프 디자인'이다. 오랜 시간 증명한 디자인이 올바른 디자인이며 물건을 고쳐가며 오래 계속해서 사용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식을 토대로 '지역 다움'을 발굴하고 발신하는 것 또한 그들의 핵심 활동이다.
2013년 디자인 회사 밀리미터 밀리그램(mmmg)과 파트너쉽을 맺어 서울 이태원에 첫 지점을 오픈했다. 그리고 최근 국내에 또 하나의 거점이 탄생했는데, 바로 제주점이다.
제주점의 파트너는 씨킴 회장이 이끄는 (주) 아라리오이다. 제주점의 위치는 탑동으로 제주시의 구도심지이다. 최고의 번화가였던 탑동은 현재 개발이 멈추고 한적한 삶이 남아있는데, 이는 d&d가 추구하는 '지역 다움'과 잘 어울린다.
제주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지만, 개발과 발전보다 '재생'과 '공생'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제주 구도심 또한 지역민과의 공생을 도모하며 산지천 주변의 낡은 건물들이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리고 제주 d&d와 같은 공간이 생겨나면서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자라온 공예품과 지방 산업,특산품과 그 소재 및 기술 등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제주점 1층에 오프닝 첫번째 기획전시로 'LONG LIFE DESIGN-47도도부현의 건강한 디자인'전을 개최하고 있다. 이 전시는 각잡고 보지 않아도 되는 팬시함이 장점이다. 올바르고 건강한 디자인을 주제로 기획한 본 전시에는 제주의 대표적인 롱 라이프 디자인 10점도 포함되어 있다. 일정에 없었던 이 '전시'는 스치듯이 우연히 만났지만 '제주'지역을 잘 나타내는 디자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내 여행 속엔 어떻게든 '전시'가 존재하는 것이 신기했다.
제주점에는 최초의 d&d 숙박이 만들어졌는데, d&d의 창업자 나가오카 겐메이는 창업 당시부터 호텔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 목표가 20년 만에 제주도에서 실현된 것이다. 그는 보통의 호텔과 같은 구조가 아닌 제주에 사는 친구 집에 방문하는 감각으로 묵을 수 있는 곳을 원했다고 한다. 실제로 방문해보니 리셉션도, 긴 통로도 없었다. 일반 가정집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 공간은 회원제로 운영되는데, D&D 지역활동을 응원하는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
"지역을 재생하는 것은 문화예술 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지역의 문화와 삶, 그리고 스토리를 함께 담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 씨킴
산지천 갤러리
산지천 갤러리에는 '굴뚝'이 있다. 갤러리 건물에 굴뚝이라니. 목욕탕이자 여관이었던 '금성장'과 '녹수장'을 리모델링하여 갤러리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제주 구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이었다. 제주 구도심을 가로지르는 산지천변 주변에는 낡은 여관 건물이 많이 남아있다. 과거 숙박의 기능에서 문화 공간으로 재활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 전문 전시관이자 지역커뮤니티의 거점지이기도 하다.
에필로그
숲.맥주.보리빵
이번 제주 여행 중 화이트큐브 속 '전시'일정은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전시일정이 미루어지거나 취소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사려니숲길 걷기' 라는 일정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정하지 않고 급하게 제주로 향했다. 갇혀진 전시장보다 자연, 로컬 속에 있고 싶었다. 제주의 숲 속을 걷고 제주 보리로 만든 수제 맥주를 마시고, 그들의 주식이었던 보리빵을 먹으며 오롯이 그들의 삶을 느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