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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구씨 May 27. 2019

멋대로 쓰다 #6) 정체성 정치의 한계와 포스트모더니즘

 지난 4월, 사람들이 ‘세기의 논쟁’이라며 기대를 모은 한 강연이 개최되었다.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마르크스주의자 슬라보예 지젝과, 안티 페미니즘적 행보로 최근 2030 남성 사이에서 강한 지지를 받는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이 논쟁하는 자리였다. 강연의 이름은 <Happiness : Capitalism vs Marxism>으로, 제목 자체는 추상적인 주제에 대해 뻔한 방식으로 대립하는 진영 논리들을 연상케 했다. 그렇지만, 우려와 달리 논쟁의 주제는 구체적이고 현재적인 것이었다. 바로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문제들이다.


 정치적 올바름, 약칭 PC를 모르는 현대인은 이제 점점 드물어져 가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을 PC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PC의 기본 이념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보급되어 수많은 공감과 우려를 양산하고 있다. ‘약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의 규제’라는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는 이 일련의 흐름은, 1970~80년대에 촉발된 한 현상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정체성 정치’다.


 PC를 얘기하는 데 있어 정체성 정치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LGBT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등의 성소수자들에게 하나의 일치된 정치적 정체성을 부여한 단어다. 그들은 ‘LGBT’라는 정체성을 통해 마치 당과 같은 하나의 소속감을 형성했고, 그를 기반으로 주류사회에 목소리를 내려고 시도했다. 물론 LGBT가 정체성 정치의 시조라는 말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인종, 여성, 성소수자의 이름으로 하나의 그룹이 된 그들은, 그들의 권리가 사회의 주변부에만 머무는 것은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일이라고 역설했고, 상당수의 세계인들은 거기에 공감했다.


 얼른 보아도 다양성을 진작시키는 운동처럼 보이건만, 오히려 최근 정체성 정치는 비판의  중심이 되고 있다. 앞서 얘기한 지젝 역시 <사람들은 왜 조던 피터슨의 말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할까>라는 짧은 글을 기고하여, 최근 피터슨과 같은 대안 우파들이 빠르게 결집하는 이유를 PC 그 자체의 결함에서 찾기도 했다.


 왜 PC의 본영인 서구 세계가 오히려 PC와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역설하기 시작했을까? 왜 남성들은 일개 무명 학자였던 피터슨에게 갑작스런 충성심을 보이기 시작했을까? 필자는 이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필자의 견해를 곁들여 수박 겉핥기 수준의 얕은 깊이로 풀이해보고자 한다.


 모더니즘, 즉 근대성의 다음(post)을 보겠다는 의미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 학문적으로 정확한 분류를 내리기가 어렵다. 다만 우리가 흔히 포스트모던이라 부르는 것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근대성을 반성하고자, ‘이성’의 과잉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성의 과잉’, 우선은 이 말부터 차근차근 이해해보도록 하자. 2차대전 전까지 유럽 문명(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그 전통을 이어온 문명들을 우선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은 오직 ‘이성’만이 올바른 것을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유럽 문명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착시현상과 같은 몸이 낳을 수 있는 온갖 착각들을 이성이 타파할 수 있다고 학습했다. 따라서 그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이성적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의 기준으로 판단했다. 수학의 발달이 그 대표적인 예다. 수학은 문제에 대한 가장 이성적인 답변에 대해 참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외의 답변에 대해 거짓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성적인 것’의 등장이 자연스럽게 ‘이성적이지 못한 것’을 등장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이성적이지 못한 것들에 대해 ‘미쳤다’는 형용사를 붙이기 시작했다. 뒤떨어지는, 정상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한마디로 ‘미친’ 사람들은 그렇게 주류 사회에서 ‘노예’가 되었다가, ‘마녀’가 되었다가, ‘흑인’이 되었고, ‘여성’이 되었고, ‘유대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그들 자신이 완벽하게 ‘이성적’이라 생각했던 나치 독일 등이, 세상에 전체주의와 전쟁을 불러온 것이다.


 이성이라는 일원적 가치로 세상 모든 것을 ‘측정’하려는 유럽의 사유 방식은, 결국 엘리트 독재를 긍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치 독일은 헤겔과 같은 대사상가들의 말을 빌려, 독일 민족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민족이라고 역설했다. 당시 대공황의 수렁에 빠져있던 독일인들은 그런 히틀러에게서 민족적이며 광적인 희망을 발견했고, 곧 나치라는 엘리트를 구심점으로 결집했다. 그들은 유대인이나 사회주의자 같은 공통의 적을 상정하여, 그 적에게 대항하기 위한 일치된 집단을 원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도 근원은 비슷했다. 과거 로마 제국의 강한 힘과 일체성을 그리워 한 일부 인사들이, 무솔리니와 영합하여 탄생한 엘리트주의 독재집단이 바로 그들이었다.


 한국과 가장 연관 있는 군국주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만엔 지폐에 얼굴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자국의 존경을 받는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학자는, 문명의 발달 정도란 그 민족이 얼마나 이성적인지에 달렸다고 보았다. 처음 일본은 그들 민족이 유럽보다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 깊숙하고 사소한 곳 하나까지 유럽인들과 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곧 메이지 유신을 통해 유럽을 학습해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과 중국 같은 ‘비이성적’인 주변국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일본은 그들을 식민의 형식으로 ‘계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마침내 그들이 유럽 국가들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이성적’인 민족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천황이라는 민족적 엘리트를 중심으로 국가구성원 전원이 하나가 되어, 동양의 문명화를 방해하는 서구의 적들에게 대항해야한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집단광기는, 진주만에서의 카미카제 자살 특공과 같은 극단적 현상으로 현현했다.


 이성, 그리고 문명이라는 가치 기준으로 세상 모든 문화를 동일하고 균질하게 만들려고 했던 결과는 바로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몇몇 사람들은 이들이 모두 근대성이 가져온 폐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포스트모던’이라고 이름 붙여진 대부분의 사람은, 물론 다방면으로 많은 학자와 개념들이 등장했지만, 결국 비슷한 메시지를 피력했다. 바로 하나의 평가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동일자’적인 사유 체계의 한계였다.


 바로 이것이 앞서 얘기한 ‘이성의 과잉’이 의미하는 바다. 예를 들어 이성, 혹은 문명이라는 동일자로 세계를 사유할 때 우리는 이성적이지 않은 것, 문명이 아닌 것을 필연적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다. 군국주의 일본은 바로 이 프레임으로 일제 통치를 정당화시켰다. 식민지 한국을 문명이 아닌 것, 즉 ‘야만’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일제는 그들이 한국의 문화를 ‘문명’ 수준으로 발전시켜줄 의무가 있다고,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가 일제가 이끄는 대로 ‘근대화’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식민지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근대화의 프레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일제의 통치에 저항할 사상적 기반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동일자적 시선을 반성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다양성’이었다. 다양성이라는 개념은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약자가 제 목소리를 내게 하는 근간이 되었다. 다양성을 통해 존재를 긍정 받은 약자들은, (정작 그들 자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마르크스의 논리를 빌려 뭉치기 시작했다. 마치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자들이 결집했듯이 말이다. 1970~80년대부터의 정체성 정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는 경직되어있던 주류 사회를 크게 흔들었다. 오늘날 다양성은 정체성 정치를 상징하는 단어로서, 많은 사람이 존중하고 공유하는 가치 중 하나가 되었다. PC 역시 그 흐름의 일환으로 잉태되었다. PC를 옹호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PC의 메시지를 한데 묶어 한 문장으로 재정의하자면 이럴 것이다.


 “다양성은 모든 것을 포용하지만 단 하나를 포용하지 않는다. 바로 다양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사회적 약자들이 정체성의 이름으로 강력한 정치집단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주류 계급, 이를테면 백인, 혹은 남성, 혹은 이성애자, 혹은 백인 남성 이성애자 등이었다. 그들은 얘기했다. “다양성, 평등, 다 좋은데, 정치적인 이점은 모조리 쟤네들이 다 가져가잖아. 왜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하고 뺏겨야 하지? …이거 ‘역차별’ 아니야?”


 이 ‘역차별’이라는 단어의 탄생에서 우리는, 마치 예전에 약자가 그랬듯이 주류 계급들이 정체성 집단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의 견해를 조금 섞자면, 최근 피터슨과 같은 안티 페미니스트들이 결집하는 현상이야말로 바로 그 예시가 된다고 본다. 페미니즘 논의에서 타자화되었다고 받아들인 남성들이 정체성 집단화하여, 피터슨을 그 목소리로 삼은 것이다.


 “잠깐, ‘타자화’라고?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을 타자화시키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인가?” 반론하기에 앞서, 필자가 PC를 재정의한 문장을 상기해보자.


 “다양성(정체성)은 모든 것을 포용하지만 단 하나를 포용하지 않는다. 바로 다양성을 침해하는 것(내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다.”


 다양성 대신 다른 단어를 집어넣어도 문장이 성립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성(문명)은 모든 것을 허용하지만 단 하나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성적이지 않은 것(야만)이다.”


 그렇다. 다양성, 혹은 정체성이라는 동일자가, 다양성이 없는 것, 정체성이 다른 것이라는 타자를 낳아버리고 만 것이다. 이리하여 아이러니하게도,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체성 정치(그리고 PC)는 백인우월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들의 결집을 낳았다. 결과론적인 분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아예 무시하고 지나갈 만한 문제점 또한 아니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다양성은, 이전에 약자들에게 그러했듯 주류 계급의 결집을 긍정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말았다. 정체성이 난립하여 말그대로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필자만의 단어로 표현하긴 했지만, 세계의 좌파 지식인들이 PC와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와 같다. 그들은 16년도의 트럼프의 당선이 정체성 정치의 과잉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비판점은 또 있다. 흔히 PC 전사(Partisan)라 불리는 일부 신좌파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의 주장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할렘 가와 유리천장이 존재하지 않는가? 최근 반이민자 포퓰리스트들처럼 어이없는 도시 괴담을 유포하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좌파들의 진실은, (지젝에 따르면) “거짓에 복무하는 진실”이다. 지나치게 정체성에 매몰된 시각으로 거대 담론을 바라볼 때, 그 시선은 왜곡되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마치 (과장을 아주 많이 보태자면) 히틀러의 등장에 열광했던 독일 국민들의 시선과 같이 말이다. 당신은 정체성에 혈안이 된 일부 PC 전사나 그에 대항하여 정체성 집단화하기 시작한 대안 우파들이, 나치즘 시절 독일 국민들과 그 형식상 다른 점을 찾을 수 있겠는가? 물론 내용상 그들 사이의 교차점은 전혀 없다고는 해도, 하나의 가치 기준에 매몰되었다는 점에서 두 항의 사고방식은 일면 공통된 점이 있다.


 PC와 정체성 정치에 한계를 느낀 좌파들은 이제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최근 힐러리가 대선 캠페인 당시 인용해 유명해진 ‘상호교차성’이라는 개념 역시 그중 하나다. 예를 들어, A라는 가상의 인물이 있다고 하자. A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은, 여성으로서의 압력, 황인으로서의 압력, 후천적 장애인으로서의 압력, 결정적으로 ‘황인 여성 장애인’으로서의 압력이 교차하여 동시에 가해질 것이다. 이 개념은 개인의 억압을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억압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체성 정치의 주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여전히 억압을 정체성의 집합으로서만 기계적으로 바라본다는 한계를 가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회문화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통찰이나 반성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국에서의 사회운동이라는 측면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글을 줄이도록 하자. 확실히 위의 논의는 여태껏 신좌파니, 대안 우파니, 미국의 정치 용어들을 통해 현상을 바라본 면이 있다. 정체성 정치가 한계에 부딪혔다고 한들, 그것은 미국에서 부딪친 것이지 한국에서 부딪친 것은 아니다. 정체성 정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여러 개념 역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계의 맥락에서 제시된 개념일 뿐이다. 한국에서의 일상적 경험, 이를테면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혐오 발언이나, 혹은 혐오를 긍정하는 확증 편향 등을 보고 있자면 우리 사회에 상호교차성과 같은 최신 개념이 아니라 우선 정체성과 다양성만이라도 정착시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체성과 다양성이 우리 사회를 진일보시킬 수 있는 도구이기는 하나 여전히 그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알아본 바와 같이 저 개념들은 근대에서부터의 사고방식, 즉 하나의 가치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고방식을 탈피하지 못한 개념들이다. 적절한 정체성 정치를 통해 ‘차이’를 간직한 여러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인지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다음에는 난립했던 정체성을 서서히 지운 후, 우리 사회가 ‘차이’ 그 자체를 긍정할 수 있도록 방향을 설정하는 게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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