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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구씨 Jul 04. 2019

멋대로 쓰다 #7) 게임중독에 관한 짧은 에세이

 대학생으로서, 기말시험이 끝난 요 며칠간의 나날들은 바다 한가운데 돛단배나 다름이 없었다. 목표가 사라진 시간들의 허기를 채우느라 이리저리 방황했을 대학생들의 마음을 필자도 십분 이해한다. 몇 년 동안이나 학식 짬을 먹었는데도 아직 학기가 끝나면 존재가 이리 붕 떠버리니, 어디 가서 내가 고학번입네 하는 말조차 꺼내기 부끄러워진다. 경험상 기말시험 기간 전후로 피시방에 사람 발길이 잦아지곤 하던데, 이런 필자가 어떻게 그들을 너그러이 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필자도 최근에는 제법 게임에 빠져 지냈다. 시간이 조금 뜬다 싶으면 바로 목마른 여행객처럼 피시방으로 달려갔다. 값싼 노력으로도 살 수 있는 게임에서의 그 풍부한 성취감이란, 이런 나라도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단 온라인 RPG에서 고레벨을 달성하는 것 같은 눈에 보이는 성취감뿐이 아니다. 모바일 게임 같은 간단한 구조의 게임이라도, 조금의 노력으로도 게임에 적응하고 곧장 어려운 난이도도 척척 해내는 자신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이 게임의 대가라도 된 양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게임 중독이 이래서 오는 건가?’ 한국이라는 과도한 성과 사회에서 인정 욕구를 넘어 인정 결핍에 시달리다시피 하는 현대인들이, 그 헛헛한 자존감을 기대는 출구가 만일 게임이라면? 시스템의 문구가, 커뮤니티의 게이머들이 자신의 값싼 성과를 인정해주고 경의를 보여주는 세계라면, 이거 뼈를 묻고도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지나간 것이다.


 MBC <100분 토론>에서 유튜브 크리에이터 대도서관을 비롯한 몇몇 패널이 나와 게임중독이 질병인가 아닌가를 두고 설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질병이 아니다’라는 편에 섰던 대도서관은 다음과 같은 논거를 통해 10대 게이머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우리 학생들이 (…) 수업을 받는데, 거기서 성취감을 얻는 학생들이 몇 퍼센트냐는 거예요. 그 아이들은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밖에 없어요. 그럼 나머지 학생들은 도대체 어디서 성취감을 느끼나요.



 저 말은 오히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자아가 막 구성되기 시작한 10대 청소년들은, 그들이 생존해나가야만 하는 불안한 ‘성과 정글’ 속에서, 자기 자신이 존재해도 좋은 이유를 게임 안에서 찾으려 한다.” 왜냐하면 ‘공부 잘하는 애들’이라는 선택받은 집단의 공급은 한정되어 있고 수요는 늘 넘쳐나기 때문에, 을의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학생들은 살아남기 위해 본인이 더 화려하게 포장된 상품임을 과시해야하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마치 한정된 일자리에 시름하는 우리 20대들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거세당한 나 자신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싶은, 혹은 누군가 나 자신을 찾아내 주길 간절히 기대하는 10대들은 컨텐츠에 쉽게 ‘중독’되고 만다. 그게 아이돌이던, 애니메이션이던, 혹은… 게임이던. 이는 비단 10대들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게임이란 돈을 지불하고 경험을 사는 상품이다. 소비자들이 불쾌하고 힘든 경험을 돈을 주고 사고 싶을 리 없기 때문에,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쉽고, 매끄럽고, 평면적인 경험들을 더 화려하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제공할 수밖에 없다.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현실의 문제들처럼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자본의 필터링을 거친 본능적인 경험들만이 소비자들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게임이 팔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게임의 폐해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화된 게임산업이 성과사회의 어두운 면과 만나 발생한 폐해다.


 이러니 필자는 게임중독이 질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한가지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게임중독에 질병코드를 부여했다고 모든 게임과 게이머들이 모두 순식간에 유해 매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알코올 중독은 질병이지만 우리는 매주 토요일마다 유해 매체인 술을 마시기 위해 거리를 전전하지 않는가?


 이런 비유를 들면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술은 그래서 19세 미만에게 판매하지 않는 등 나라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습니까?” 필자가 얘기하고 싶은 본질이 바로 그것이다. 게임 산업에는 게임이 제시하는 경험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게임은 영화 이상으로 독자에게 생생한 경험을 선사하는 미디어임과 동시에, 인류가 처음 만나는 최첨단의 미디어다. 가상현실이라는 기술이 개발되자마자 발 빠르게 상용화된 산업 분야는 바로 게임 산업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더 현실적인 가상세계를 더 경쟁력 있는 자원으로 구동시키기 위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산업 분야 역시, 게임산업이다.


 이런 미디어 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의 경지가 분명 존재할 것이라 필자는 믿는다. 우에다 후미토 감독은 그의 2001년 작 게임 <ICO> 의 몽환적인 아트 워크와 음악, 그리고 여백으로 채워진 게임성을 인정받아, 영국 아카데미 게임상(British Academy Games Awards)의 예술적 성취도 부문에서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일본 게임 감독계의 거성 아오누마 에이지의 2017년 작품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는, ‘역사상 모든 게임 중 최고’라는 평을 들으며 게임 관련 각종 시상식에서 당해 수여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인 ‘GOTY(Game Of The Year : 올해의 게임)’를 쓸어담기도 했다.


 다시 얘기하자면, 게임은 충분히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현세대의 첨단 기술이 집약되었다는 그 미디어의 특성상, 게임이 제시하는 경험이 다른 매체들과는 다르게 독자에게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앞서 얘기한, 전 세계의 찬사를 받는 게임들과 TV 광고에서 흔히 접하는 소위 ‘양산형’ 게임들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과장된 섹스를 어필하는 여성 캐릭터들, 수치화되어 끝없이 성장할 것을 강요하는 시스템, 더 자극적이고 폭력적임을 과시하는 액션과 전투 구조, 도박과 다를 바 없는 게임 내 구매 아이템들….


 이 모든 사태가 단지 ‘게임중독은 질병인가?’라는 심하게 축약된 한 문장으로 요약되어 이슈화되고 있는 현 상황이 필자는 너무나도 안타깝다. 게임 중독은 질병이다. 그러니 게임 제작사와 배급사는 좀 더 주의해서 콘텐츠를 제작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게임 그 자체는 다양성과 예술성을 지닌 멋진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잠에 쉬이 들지 못하는 6월의 어느 더운 밤, 오늘도 온라인 게임의 연속성에 매몰돼 꽤 오래 피시방 책상 앞에 앉아있었던 필자는 이렇게 게임의 무서움에 관해 쓴다. 언젠가 게임이 문학의 한 종류로 인정받는 날이 오길, 필자는 진심으로 고대한다.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에 다가가, 오랜 세월 동안 잊히지 않을 게임들이 한국에서도 더 많아지기를. 그러려면 우선 온라인 게임에서의 끝이 보이지 않는 레벨업부터 사라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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