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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구씨 Dec 21. 2019

하이퍼 리얼리티와 리얼돌


대학교 과제로 쓴 글을 저장하고 싶어서 남긴다.

틀린 말도 엄청 많을 것이다.




여는 글


    나는 오늘날 우리가 이미 하이퍼 리얼 사회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바일 기기와 플랫폼의 높아지는 접근성, 확장되어가는 VR 시장과 캐릭터 시장, 비디오 게임 등등,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이미 깨어졌다는 증거는 이미 일상 속에 즐비하게 널려있다. 선현이 걱정해 마지않았던 진실과 거짓의 경계마저 이젠 흐릿해져, 사실을 ‘사실성’의 망이라 규정하는 게이 터크만과 같은 언론인도 있고, 이제부터는 세상이 ‘사실충실성’에 입각해야 한다는 데이터 과학자 한스 로슬링 같은 인물도 있다. 보드리야르의 우려와는 달리, 세상은 실재를 잃어버린 채 환란의 축제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실재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힘을 기르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부르자면 과도기라 부를 수도 있는 오늘날, 지나친 시뮬라시옹으로 물신화되어선 안 될 것들이 물신화되어 도덕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보드리야르의 하이퍼 리얼리티 개념을 최근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리얼돌’에 적용하여 해석해보고 싶다.


    이젠 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섹스 토이 샵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2019년 한국의 성 담론은 그 폐쇄성으로부터 얼마 정도는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이제 무엇이 성 개방이고, 무엇이 성폭력이며, 무엇이 성 혐오인지에 대한 엄밀한 논의가 필요한 이 시점에서, 리얼돌 논란은 어쩌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숙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장애인 등 성적 소외자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이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얼돌은 지금 현존하고 있는 개인의 소외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사용 혹은 생산이 지양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 글에서 밝히고 싶다.


    그러한 논의의 진행을 위해, 우선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이 어디서부터 왔으며, 그 개념은 어떻게 그의 ‘하이퍼 리얼리티’ 개념으로까지 이어지는 지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다.





‘시뮬라크르’ 개괄


    장 보드리야르는 1929년 프랑스 랭스에서 태어났다. 맑스주의 사회학자인 스승 앙리 르페브르 밑에서 수학했고, 구조주의 학자 롤랑 바르트를 연구했다. 1981년 대표 저서인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발표했다. 보드리야르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의 역사를 간단히 짚어보자.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이 처음 제창한 개념으로, 실제 사물이 아니지만 그것과 한없이 ‘닮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내가 지면에 ‘고양이’이라고 쓰는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양이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고양이의 모습은 결코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지만, 실재하는 고양이와 한없이 닮아있는 환상(phantasma)이다.


    플라톤 자신은 이 개념을 존재에 위계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했다. 플라톤이 보기에 존재는 원본인 ‘이데아’와 그의 모방인 ‘에이콘’, 그리고 그 모방과 한없이 닮은 ‘시뮬라크르’의 세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플라톤은 에이콘과 시뮬라크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에이콘은 이데아를 충실히 모방한 것이지만, 시뮬라크르는 모방을 또 한 번 모방한 것으로서 이데아의 원래 내용마저 혼란스럽게 해 버린다. 따라서 시뮬라크르는 이데아를 모방한 것(미메시스) 가운데서도 가장 부정적인 것이며, 특히 예술과 같은 시뮬라크르들은 시민들을 혼란에 빠트리기만 할 뿐이므로 사회에서 아예 추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플라톤의 시뮬라크르론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질 들뢰즈가 1969년 <의미의 논리>의 부록으로 실은 <플라톤과 시뮬라크르>이다. 들뢰즈는 플라톤주의를 ‘동일성의 철학’으로 규정한다. 왜 ‘동일성의 철학’인가? 플라톤은 개개 현상의 차이를 이데아라는 ‘동일성’ 안으로 끊임없이 환원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 환원된 차이들에게 ‘동일적이다’, ‘동일적이지 않다’는 기준으로 ‘참’과 ‘거짓’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훗날 칸트, 헤겔 등 이성주의로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사유 구조를 ‘동일성의 철학’, 혹은 환원주의라고 한다. 환원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은, 그것이 세계대전 때에 이르러 히틀러의 나치즘을 낳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들뢰즈가 보기에 시뮬라크르는, 그러한 이데아의 존재론적 우위, 혹은 자기동일성을 깰 만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뮬라크르가 모방의 모방이라면, 시뮬라크르 자체는 원본과는 아무런 연결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시뮬라크르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원본이 되는 것이다. 플라톤이 미메시스를 보고 ‘이데아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지적했던 것은, 오히려 거꾸로 모방이 원본을 전복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역설이었다. 이는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를 통해 ‘아우라의 상실’이 일어날 것이라 얘기한 것처럼, 들뢰즈 역시 모사를 통해 원본을, 나아가 동일성의 논리를 전복해버리려 한 시도라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본 현대 사회


    들뢰즈가 이렇게 희망적으로 시뮬라크르를 묘사한 가운데, 보드리야르는 ‘코드’에 의한 소비라는 다소 우울한 전망이 담긴 시선으로 시뮬라크르를 본다. ‘코드’라니?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선 보드리야르가 현대 사회를 어떻게 보았느냐부터 얘기해야 할 것이다.


    애덤 스미스 이후부터 소비는 늘 ‘합리적인 이익 추구자’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현대 사회의 소비는 소비자의 합리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잉생산으로 인해 풍요를 누리고 있는 오늘날, 소비자들은 상품의 기능이 아니라 그 이면의 ‘기호’를 소비한다. 이를테면 소비자들은 품질 좋은 무선 블루투스 이어폰으로서의 ‘에어팟’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혹은 이미지)로서의 ‘에어팟’을 소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호로서의 소비’는, 개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오히려 몰개성화된 현대 사회의 특성과 결합하여, 소비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기호를 소비하도록 종용한다. 이를 통해 같은 기호를 소비하는 집단이 공유하는 일종의 문화 수용체계가 생겨나는데, 이를 ‘코드’라고 한다. 코드는 계급을 만든다. ‘에어팟’의 예로 돌아와 보자. 에어팟의 소비자들은 에어팟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동시에, 그와 같은 고가의 액세서리를 보유하고 있는, 말하자면 ‘에어팟 소유자’의 코드 안에 편입된다. 이를테면 에어팟 소유자들은, 에어팟 케이스와 같은 에어팟 관련 2차 상품들을 구매할 수도 있고, 혹은 같은 에어팟 소유자들과 함께 에어팟과 관련된 대화도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에어팟을 소비할 구매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 사회로부터 소외될 것이 자명하다. 이제 사회에는 에어팟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라는 계급이 만들어져 버린 것이다.


    이런 코드는 TV와 같은 미디어가 끊임없이 송출하는 기호의 재생산을 통해 ‘재학습’된다. 낡은 코드는 미디어에 의해 새로운 코드로 생산되고, 소비자들은 코드에 복종하기 위해 그것을 재학습 한다. 이것이 이른바 ‘유행을 쫓는다’는 현상이다. 이는 그의 스승 앙리 르페브르가 현대 사회를 ‘소비 조작의 관료제 사회’라고 규정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기업가는 이제 코드를 조작함으로써 소비마저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시뮬라크르와 ‘하이퍼 리얼리티’


    보드리야르가 본 현대 사회가 이러하다면, 우리는 아마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가 되는 과정을 ‘시뮬라시옹’이라고 한다. 몰개성화된 사회에서 소비자들은 ‘차이’를 획득하기 위해 기의 없는 기표(시뮬라크르)를 소비하는 데에 더욱 몰입한다. 그렇게 소비하는 사이에 어느새 실제 상품의 사용가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시뮬라크르만의 끝없는 유희만이 남게 된다. 들뢰즈가 원본이 사라진 모방에서 원본의 자기동일적인 권위를 깨버릴 강한 생명력을 포착했다면, 보드리야르는 마치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 개념과 같은 실재 없는 모방의 끝없는 유희,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의 계급화와 물신화를 본 것이다.


    이리하여 보드리야르는 원본의 원본성을 뛰어넘은 모방, ‘하이퍼 리얼리티’라는 사유에 이르게 된다. 미디어의 끝없는 시뮬라시옹으로 인해 구성된 가상들만의 세계, 실재가 완벽하게 압도당한 세계가 바로 하이퍼 리얼리티다. 영화 <매트릭스>가 그리는 가상 세계나, 혹은 VR(Virtual Reality) 기기를 통해 경험하는 가상 세계 등이 바로 하이퍼 리얼리티의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가 끊임없이 하이퍼 리얼리티를 재생산하는 이러한 현대 사회에서, 실재를 잃어버린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 소통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조차 모르는 채 소비의 축제만을 되풀이한다는 보드리야르의 허무주의적인 통찰은, 스마트폰과 유튜브를 눈 앞에 달고 사는 오늘날 더욱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쿡방’이나 ‘먹방’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고가의 음식을 요리하는 동영상을 틀어놓고 정작 본인은 컵라면을 먹으면서, ‘라면 준비되었으니 이제 동영상 튼다’ 같은 자조적인 댓글을 달곤 한다. ‘먹방’이라는 하이퍼 리얼 앞에서, 리얼은 컵라면이나 먹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현대 사회가 보드리야르의 관점처럼 허무한 축제의 현장이 되어버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라서, 가상이 주는 유희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여러 동영상을 향유하는 동시에, 그것이 우리를 바보상자로 만들지는 않을지 늘 염려한다. 인터넷 곳곳에서 발생하는 가짜 뉴스의 폐해를 발견하고, 독자 스스로 가짜 뉴스를 골라낼 수 있도록 인포그래픽을 배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의보다 비대해진 기표가 도덕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리얼돌’ 역시 그 경우에 해당된다고 말하고 싶다.





‘리얼돌’ 논란에 적용, 결론


    ‘리얼돌’은 사람(주로 여성)의 전신을 본떠 인형처럼 만든 정교한 섹스 토이를 뜻한다. 한국에서는 지난 6월 대법원이 리얼돌 수입을 허가한다는 판결을 내리고 난 뒤부터 논란이 크게 확산되었다. 사법적인 논의는 이곳에서 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보드리야르의 하이퍼 리얼리티와 관련된 얘기만 이어나가고 싶다.

   

    맑스는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불일치하면서 발생하는 ‘환등상’이 화폐의 물신화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화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기증식적 본성 때문에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점점 더 비대해지면서, 화폐 자체가 하나의 물신이 된다는 것이다.


    만일 맑스의 저 비판의 주어를 ‘기의와 기표’로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보드리야르의 하이퍼 리얼리티에도 ‘물신숭배’라는 비판을 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디어 사회에서 시뮬라크르가 지닌 자가증식적 본성 때문에 비대화된 기표들이, 기의를 잡아먹고 있는 현상이 바로 하이퍼 리얼리티 아니었던가? 거기에 더해서, 리얼돌과 같은 하이퍼 리얼리티는 직관적으로도 충분히 ‘물신숭배’라는 판단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아직 어떤 하이퍼 리얼리티는 비판받아야 하고 어떤 하이퍼 리얼리티는 비판을 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아직 남아있다. ‘하이퍼 리얼리티는 물신숭배다’라는 비판 만으로 논의를 끝내버리면, 그것은 환원주의적인 편집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쥐의 시뮬라크르이자, 동시에 쥐 이상의 원본성을 지니고 있는 하이퍼 리얼리티 ‘피카츄’에게 다소 물신숭배적인 측면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사회적으로 지양해야 한다는 결론은 섣불리 나오지 않지 않은가? 만일 그와 같은 근거로 피카츄 관련 상품을 판매 중지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도리어 그들이 편집증 환자라는 비웃음을 받고야 말 것이다.


    리얼돌은 안 되고 미키 마우스는 되는 이 상황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선 어떤 논리가 필요할까? 나는 다시 맑스의 ‘소외’에서 상황의 타개를 빚지고 싶다. 리얼돌은 소비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기표가 성 상품화라는 목적에 맞추어 다시 한번 복제된 시뮬라크르다. 소비를 목적으로 복제된 가상의 여성을 마치 여성처럼 소비하는 문화는, 현존하는 여성들이 그들의 성성(Sexuality)으로부터 소외되도록 만든다고 말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물론 여성들이 향유하는 섹스 토이 중에도, ‘딜도’라는 남성기의 하이퍼 리얼리티가 존재하긴 하다. 그러나 신체의 일부인 성기를 모방한 딜도와, 피부부터 얼굴, 머리카락, 성기 등등 인체의 모든 요소를 ‘재현’해내려고 한 리얼돌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리얼돌은 대체 무엇을 ‘재현’하려고 한 것인가? 페니스의 모방인 딜도를 보면서 남성들이 ‘내 인간성을 침해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방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얼돌의 목적이 가상의 ‘여성’의 ‘재현’이라면, 그것은 현존하고 있는 여성들의 성성 혹은 인간성 전체를 시뮬라크르로 대체하겠다는 말과 동의어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게 ‘소외’가 아니고는 무엇이랴? 다만 이것을 사법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말은 윤리학의 월권이기 때문에, 사용과 생산을 지양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 밖에 할 수 없을 따름이다.





참고문헌

이혜진 김윤재(2006), <보드리야르와 시뮬라크르, 그리고 이미지>, 인문학연구제 11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문화연구소, pp.132~150

박치환(2008), <J.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개념에 대한 일 반역(反譯)>, 해석학연구제21집, 한국해석학회, pp.139~180

유윤영(2019), <들뢰즈의 철학에서 시뮬라크르의 존재론>, 인문논총제49집, 경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pp.5~28

김가현 하지수(2018),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 이론의 관점에서 본 한국인의 문신>, 복식문화연구 26권 4호, 복식문화학회, pp.485~502

김남희 (2002), <자본주의와 후기 자본주의, 그리고 인간소외>, 한국시민윤리학회보, 15, pp.32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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