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BX 디자인을 할 거야
BX 디자이너라는 진로를 정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전쯤이었다. 긴 유학 생활 내내 나는 진로에 대한 고민에 심하게 빠져 있었다. 물론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기왕이면 멋있고 재밌는 걸 하며 살고 싶었다. 할 줄 아는 건 정말 많은데 이걸 다 써먹을 수 있는 직업이 작가 말고 있긴 한가 싶었다. 하지만 작가는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던 중, BX 디자인으로 시선이 갔다. 기획과 연출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하나에 꽂히면 일단 끝장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극단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BX 디자인에 꽂히자마자 공부를 시작했다. 혼자 이것저것 찾아보며 배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막상 배워보니 브랜딩이라는 개념 자체가 마냥 낯설지 않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독립 출판 작가로 살며 계속해서 나 자신을 브랜딩을 해 왔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BX 디자이너 로서의 미래에 완벽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끝까지 준비해보고, 일도 해보고, 나랑 정말 맞지 않으면 그때 다른 일을 생각해보자. 그렇게 내년 2월까지 공부와 취직 준비를 이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자리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생에 단 한 번 밖에 안 만나 본 소개팅 남에게.
처음에는 황당했다. 나에 대해서 뭘 알고? 한 번 밖에 안 만나봤는데? 내 작업물을 본 적도 없으면서? 물론 소개팅 자리에서 내가 열심히 입을 털긴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남자와 대화의 흐름을 이어 가고 싶었던 나의 얍삽한 몸뚱이는 머리를 배신하고 재빠르게 [네!!!] 하는 답을 보내 버리고 말았다.
그래, 일단 만나는 보자. 그리고 거절하면 되지. 간단히 설명을 들어 보니, 남자의 후배 한 명이 두부를 가지고 과자를 만드는 스타트 업을 진행 중이고 현재 디자이너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스타트 업? 실리콘 밸리, 김도산, 한지평... 그 스타트 업? 원래부터 기업의 규모에 대한 꿈과 환상이 없었기 때문에 스타트 업이라는 것 자체가 신경 쓰이는 건 아니었다. 다만 두부 과자라는 것에 약간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남자에게 내 애프터 신청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먼저 그의 후배를 만나는 것 자체가 웃기지 않은가.
나의 예상으로는 분명 그 후배는 남자와 친한 사람이 아닐 것이었다. 나라면 나의 지인에게 단 한 번 만난 소개팅남을 절대 소개해 주지 않을 거다. 특히 거절 의사가 있는 상대라면 더더욱. 물론 남자는 정상보다는 비범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지만. 어쨌거나 보통 사람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괜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이렇게 돌려 돌려 날 까는 거야? 와! 웃기는 사람이네, 아주?! 두부 과자가 어쩌고 저째? 참나. 딱 잘라 거절할 거야!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