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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바다 Apr 23. 2019

내 안의 나를 찾아서, 리스본행 야간열차

독서치유심리학자 김영아의 힐링 책방(17)

열심히 달려온 당신에게 무슨 일이?

몇 년 전 여름, 꽤 큰 병원의 병원장인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오랜 세월 환자를 위해, 병원을 위해 일해 왔다고 했습니다. 승승장구해 온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습니다. 배가 더부룩해서 초음파를 했더니, 췌장에서 이상이 발견된 거죠. 신체적 고통보다 더한 마음의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큰 병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과 내가 뭘 잘못했다고 병이 생겨? 하는 분노, 그리고 병원과 환자만을 위해 달려온 삶 전체가 비참하게 느껴져서 힘들다고 말하시더군요. 

저는 그분이 상황을 한 발 떨어져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권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다

라틴어 교사로 살아가던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한 여자를 구합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그는 여인의 흔적을 좇다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만나게 되고, 홀린 듯 여인과 저자를 찾아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릅니다. 

“왜 저는 병원 제 골방에서 떠나지를 못했을까요?” 이렇게 말하는 그분에게 저는 떠나지 못한 것이 아니고, 떠나기를 잊은 것은 아닌지 되물었습니다. 이틀 뒤 다시 만난 그분은 그 답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닌 그가 찾아 나선 인물, 아마데우 프라두에게서 말이죠. 프라두는 판사 아버지의 강요 아닌 강요로 의사가 되었고, 시인으로, 저항운동가로 격정적 삶을 산 인물인데요. 그레고리우스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프라두의 삶의 조각을 맞춰가면서 자신이 간과한 인생의 다른 측면을 바라봅니다.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고통에서 구해줄 수 있는 의사. 나에게 보내는 신뢰 때문에 난 아버지를 사랑했고, 절절한 소원으로 날 짓누르는 그 부담 때문에 증오했다. 

의사로 살기를 강요받았고, 여행 한 번 떠나볼 겨를 없이, 학회, 진료, 강의라는 테두리를 삶 전부로 믿고 살아왔다고 그분은 한탄했습니다. 원장실이 4평에서 10평, 20평으로 커졌지만, 그는 그 안에서만 살았던 것입니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왜 난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의 전부인 것으로 알았고 왜 내 내면이 원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요? 다르게 살 수도 있었는데….”라며 후회의 감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진정 두려운 것은 지난 삶이 가치를 잃는 것

그분은 ‘말을 알아듣는 거울 정도로만 그를 취급’, '백정처럼 보이게 하는' 등의 책의 구체적인 묘사를 짚어내면서 두려운 것은 사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삶의 벼랑 끝에서 한 눈 팔지 않고 달려온 삶이 허무하게 느껴졌고, 삶의 방식을 선택하지 못했던 스스로에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삶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자신의 존재적 가치와 의미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고, 그게 더 무서웠다고 자신이 느낀 감정을 정의했습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게 무엇인가? … 좋아하지 않던 직업을 그만두고, 싫어하던 환경을 떠나기, 더 진실해지고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일들을 하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변에 누워있거나 카페에 앉아 있기. … 지금까지 일만 해온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 … 메멘토를 다르게 느끼라는 권유로 받아들이기.    


시작과 끝을 내가 정할 수 없는 여정에서

‘인생’이라는 여행은 시작과 끝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마저 온전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내가 온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사는 나’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나’라는 존재를 ‘본성의 나’, ‘남이 바라보는 나’,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나’로 규정하는데요. 이 세 가지 속성의 ‘나’가 서로 연결고리를 갖고 상황에 따라 에너지가 집중되기도 하고 분산되기도 하면서 진정한 삶이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때 어떤 나로 살지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성숙한 삶이라는 것이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지금 당장 현실을 살아내느라,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 중에서 미처 보지 못한 혹은 외면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없으신지요? 프라두의 말처럼 ‘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를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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