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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바다 Feb 01. 2019

눈앞에 펼쳐진 길 위에서

독서치유심리학자 김영아의 힐링 책방(9)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기대감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합니다. 개인의 성향이나 일의 종류, 준비 정도에 따라 때로는 기대감이, 때로는 두려움이 더 크겠지요. 


실시간 믿음에 빠진 어느 임원의 심정

유명 통신회사에서 25년이나 근무하며 임원의 자리에까지 오른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회사에서 새로 뛰어든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됐는데요. 주위에서는 주력 분야에 투입되었다며 부러워했지만, 정작 자신은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기회가 그분에게는 위기로 느껴졌지요. 회사 생활 또한 이전과 180도 달라졌습니다. 능숙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자애롭게 부하직원들을 이끌던 모습과 달리 새 부서에서는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쭈뼛거렸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 왜 나를 이 자리에 앉혔을까 하는 원망이 점점 커져 나중에는 부서 이동이 회사에서 나가라는 뜻과 같다는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혔지요. <절대 회복력>(2012)으로 유명한 긍정심리학자 캐런 레이비치와 앤드류 샤테는 이를 '실시간 믿음'이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실시간 믿음이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매우 주관적이어서 어긋나기 쉽습니다. 


빙산 아래 숨겨져 있는 내면

"마음은 빙산과 같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의 말입니다. 이 말처럼 인간의 의식 밑바닥에는 거대한 실체를 가진 무의식이 있는데요. 내담자의 경우 승승장구하는 동안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무의식이 스스로 위기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부딪히자 실시간 믿음으로 나타난 겁니다. 저는 이 분의 무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유년의 경험을 알아보기 위해 가계도를 그려보게 했습니다. 미국의 가족치료 학자 머레이 보웬이 1978년에 개발한 가계도 기법은 3세대 이상에 걸친 가족 구성원의 정보와 관계를 도표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분이 재혼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법이나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분의 어머니는 항상 자신이 낳지 않은 자식들의 눈치를 보았고, 그분 또한 그 사실을 의식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면서 내담자의 내면에는 항상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자리 잡았는데요. 다른 형제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어머니가 손가락질을 받을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죠.


책 속 인물들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다

저는 그분에게 미하엘 엔데의 <모모>(1999)라는 책을 추천했습니다. 이 책은 주인공 모모가 시간을 훔치는 회색 옷의 신사들을 물리치기 위해 떠나는 모험을 담고 있는데요. 처음에 아이들이나 읽는 책이 아니냐고 고개를 갸웃했던 그분은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곧 빠져들었습니다. 책에서 모모는 호라 박사에게서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데요. 어린 소녀는 감작스러운 임무임에도 묵묵하게 해냅니다. 
호라 박사가 모모에게 임무를 맡긴 이유는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인데요. 내담자가 열심히 일해 왔기에 회사가 중요한 직책을 맡긴 것처럼요. 저는 내담자에게 모모뿐 아니라 책 속의 여러 인물들에게서 자신과 닮은 점을 찾아보라고 권했습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게 하려는 것이죠. 시간은 곧 돈이므로 낭비하면 안 된다며 사람들을 다그치는 회색 신사들, 연설가로 명망을 떨치고 큰돈을 벌지만 어느덧 기계처럼 일하게 된 기기, 시간을 아끼기 위해 키우던 앵무새를 팔아버리는 이발사 푸지... 그분은 이들 모두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문제 또한 깨달았다고 고백했는데요. 열정을 잃고 익숙한 생활에 안주하려 한 매너리즘, 차근차근 배우지 않고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보이려고만 하는 욕심이 자신을 조급하게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가슴속에 있는 시간의 꽃을 찾아

저는 그분에게 어린 시절의 자신을 향한 위로와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달간의 상담을 마치는 날, 우리는 인생 곳곳에서 만난 시간의 꽃을 적어보기로 했는데요. 시간의 꽃이란 책에서 모모가 시간도둑을 물리치기 위해 사용하는 꽃으로 시간의 속성처럼 피었다가 시들어버리지만 다시 피어날 때는 이전보다 더욱 아름다운 꽃입니다. 그분은 시간의 꽃을 언제 보았을까요?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던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좋은 회사에 들어갔을 때, 사랑하는 삶을 만나 결혼했을 때 등 그분은 살아온 발자취를 더듬어가며 빈 종이를 채워갔습니다. "살면서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참 많았죠?" 그럼 지금 맡게 된 일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제 질문에 내담자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도전과 성취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것을 해낸 뒤에 맞이하는 기쁨은 더욱 크다는 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마치 갈수록 아름답게 피어나는 시간의 꽃처럼 말입니다. 이후 그분은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일을 배우는 한편 직원들에게도 가깝게 다가가려 노력하면서 새로운 부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길을 걸어가는 방법

우리는 늘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겠지요. 모모의 친구인 청소부 베포는 이런 말을 합니다. "길 전체를 한꺼번에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낼 수 었어." 스스로를 믿고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그 길의 끝에서 지금껏 본 적 없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의 꽃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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