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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언니 Jul 08. 2021

에피소드 7. 직장 갑질 보고서

ft.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직장인의 삶을 20년 넘게 살다 보니,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많이 겪었다.


요즘은 '주 52시간 근무제', '직장인 괴롭힘 방지법' 등 근로자를 위한 법들이 많이 제정되었지만

내가 주니어로 일하던 그때 그 시절엔

근로자는 무조건 약자였고, 막강 꼰대들이 활개 치고

지켜져야 할 인권은 무시되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곤 했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네이버 직원 자살 사건이나, 서울대 미화원 사건만 보더라도...


그동안 내가 겪었던 직장 갑질 보고서를 작성해 보려고 한다.


보고서 1)

10여 년 전, 내가 모그룹(들으면 모두 아는 그룹) 임원 교육을 진행할 때 일이다.

당시 나는 교대역 인근의 교육컨설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교육이 진행되는 그룹 본사 교육장은 삼성역 근처에 있었고..


어느 날 모그룹 교육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OO 대리님(나), 내일 교육이니, 오늘 퇴근하시고 교육장 와서 간식 좀 미리 세팅해 주세요.

매주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건 머선129?

모그룹 교육담당자는 바로 교육장 위층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 아닌가?

그분은 교육장까지 3분이면 갈 수 있고, 간식은 교육장 옆 탕비실에 쌓여있지 않은가!

그런데, 교대역에 있는 나에게 금요일 퇴근하고 삼성역까지 와서 간식을 세팅하고 가라는 말인가?


회의감과 자괴감이 함께 몰려왔다.

나는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강사를 섭외하고, 컨설팅하는 일을 하려고 이 회사에 들어왔지,

남의 회사에 가서 간식이나 세팅하려고 온 게 아니었다.

화가 나고 좀 분하기도 했지만,

처음이니 금요일 저녁에 퇴근하고 삼성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 간식을 세팅했다.


이 교육은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오후 7시까지 하루 종일 진행되는 6개월 과정이었다.

즉, 나는 6개월 동안 매주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 삼성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교육장에 간식을 세팅하고 퇴근했다는 얘기다.

더 충격적인 건, 6개월 동안 토요일 종일 교육을 진행하느라, 내겐 주말이 없었다는 거다.


그래도 참을만했다. 종종 보람도 있었다.

나는 교육 업무를 좋아하고 즐기고, 이 일로 맺어진 인연이 소중했기 때문에...


그런데,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 남의 회사에 가서 간식을 세팅하는 일은 정말이지 하기 싫었다.

진지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회사 대표에게 얘길 했다.

간식은 그룹 교육담당자분이 직접 하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우린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강사를 섭외하고, 운영을 돕는 역할을 하는 거 아니냐고...


그때 나는... 적어도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대표가 내 입장을 조금은 이해해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곧 나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대표 왈,

"OO 대리, OO 대리는 공주과야? 우리가 하는 일에 귀천이 있어? 고객사가 간식 세팅해 달라고 하면 해 주면 되는 일인데, 그게 어려운 일이야? 어려우면 내가 할까?"


어이가 없었다.

공주과라니...공주과여서 간식 세팅이 싫다고 한 건가?

일의 귀천이 있어서 하기 싫다고 한 건가?

나는 어리석게도 대표에게 내 의견에 대한 공감을 바랐던 것 같다.


'우리가 추구하는 일과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객사가 원하는 일이니 OO 대리가 좀 고생해 주면 안 될까?' 하는 좋은 설득의 말을 해 주셨더라면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 텐데...

'아' 다르고, '어' 다르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대표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랫사람의 마음을 조금도 공감하지 못할뿐더러, 공감해 보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매주 금요일 퇴근 후 삼성역까지 간식을 세팅하러 갔었고,

6개월 동안 토요일 종일 교육을 진행했다.

그리고 공감 능력 제로인 대표는 내가 퇴사하기도 전에 먼저 회사를 나가셨다.

(대표는 월급 사장이었고, 성과가 좋지 못해 나가게 된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모그룹 갑질 담당자는 추후 퇴사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지금도 내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지 카톡 추천 친구에 뜨길래 차단해 버렸다.^^



보고서 2)

7-8년 전, 모회사 VIP 대상 세미나 행사를 진행할 때다.

내가 근무했던 곳이 언론사였기 때문에, 행사에 대한 보도가 나가야 했다.

VIP 중에서도 최고 VIP인 어느 한 분의 호칭이 애매했다.

대표도 아니고, 회장도 아니고, 사장도 아니고...

이 분의 사진과 사진에 대한 설명이 함께 나가야 하는데,

담당 기자가 급했던 지 이 분의 호칭을 의장으로 설정해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걸 본 행사 담당 차장이 인상을 구기며 내 옆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누가 일을 이 따위로 하라고 했어? 당장 기사 안 고쳐?"

들어본 적 없는 무례한 반말과 함께 그분의 핸드폰이 날아와 내 옆에 떨어졌다.


순간 멍했다.

나는 우리 회사 총괄 책임자로 이 행사에 와 있었다.

언론사 총괄 책임자에게 반말과 폭력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바로 교열부에 전화해 그 VVIP란 분의 호칭을 수정했다.

기사에 나간 내용을 수정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5분 남짓!!


"이렇게 나가면 곤란하니, 수정해 주세요."라고 좋게 말했어도 5분이면 수정될 일을...

어디서 배워먹지 못한 티를 내는 건 지,

내가 돈을 주는 갑사 담당자니, 을인 너에게 이래도 된다는 치기였던 건 지..


이후에도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행사 후, 쭈뼛거리며 기념품 한 박스를 챙겨 주길래

집으로 가지고 와, 바로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갑질 차장도 행사 후 얼마 안 되어 회사에서 잘렸다고 한다.


속이 후련했다.

권선징악!

뿌린 대로 거둔다!

오만가지 통쾌한 생각들이 나를 미소짓게 했다.


갑질을 하는 사람은 그 심각성을 다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당하는 사람은 다르다.


상처를 받고,

자괴감이 들고,

모욕감도 느낀다.


당신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대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세상에 영원한 갑은 없다.


지금 이 순간 갑의 입장이더라도,

언젠가 당신도 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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