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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e Sep 01. 2020

묵독은 남은 이의 몫

당신의 슬픔이 끼어들 때, 안희연

내가 열아홉 살이던 해, 그러니까 2012년 봄에 할아버지는 서울 삼성병원에 입원하셨다. 수술과 항암치료 이후에도 재발을 반복하던 위암이 기어코 악화된 까닭이었다. 처음에는 의식이 있는 채로 일반 병동에, 그다음엔 중환자실에, 마지막에는 의식이 없는 채로 다시 일반 병동으로 돌아오셨다. 집에서부터 병원까지 15분 정도 걸리는 길을 걸어가면서 ‘오늘은 울지 말아야지’ 늘 다짐했다. 내가 울면 할머니랑 엄마가 더 속상해하니까. 나보다 더 울고 싶은 사람은 할머니일 테니까. 무엇보다 그렇게 울고 나면 내가 너무 힘드니까. 옆 자리 보호자가 ‘환자가 의식은 없어도 청력은 깨어 있을 수 있어요.’라고 말해 주어서 할아버지 귀에 대고 ‘할아버지 저 왔어요. 할아버지 사랑해요.’ 말해보았다. 여전히 감겨 있는 할아버지 눈에서 눈물이 한 두 방울 떨어졌다. 그날은 울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계시던 일반 병실에서 할아버지는 가끔씩 깨어나셨다. 하루는 내가 병실에 있을 때에 의식이 돌아오신 적이 있다. ‘의식’이라는 말이 적당한 걸까. 고통과 약기운으로 인하여 정신은 비몽사몽에, 말라붙은 입으로 불분명한 말을 뱉어내는 그 상태를 이르는 표현으로. 그날도 그렇게 깨어나신 할아버지가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알고는 내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무슨 말을 하려 그러시나. 아주 작은 소리로 밖에 말하지 못하셨기에 할아버지의 달싹이는 입 옆으로 귀를 가까이 갖다 붙였다. 작지만 뚜렷하게 “비는 잘할 거야. 다 잘 될 거야.” 하셨다. 의식이 있을 때에도 종종 하시던 말이다. 새삼스러운 말도 아닌데, 한 단어 뱉어내기도 힘든 목과 입으로 굳이 말하셨어야만 했나. 그 날은 할머니 눈치도 못 살피고 울었다. 할아버지는 며칠 뒤 그 병실에서 돌아가셨다. 같은 해의 여름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빠의 아빠다. 나의 아빠는 손녀인 나를 대하는 당신의 아빠를 낯설어했다. 아빠가 어릴 적, 할아버지는 매우 엄하신 분이었다고 한다. 무언가 잘못하면 팬티바람으로 쫓겨나기 일쑤였다고. 나는 오히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공주나 강아지라고 부르시던 목소리. 같이 살 적에는 퇴근길에 늘 쥐고 오시던 검정 봉다리. 그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과자나 요구르트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따로 살 적에는 내가 갈 때마다 버선발로 뛰어나와 ‘먼 길 오느라 욕봤다.’ 하며 꽉 안아 주시던 품. 게임장에 가보고 싶다는 손녀를 차에 태우고, 길가는 아이들에게 ‘여 게임장이 근처 어디에 있노? 아니, 컴퓨터 하는데 말고. 그 동전 놓고 하는 데!’ 물어물어 나를 기어코 게임기 앞에 앉혀 놓으시던 것. 키우던 토끼에게 먹일 풀을 뜯으러 같이 산에 간 날, 커다란 산모기에 놀란 내가 비명을 지르니 혼비백산 뛰어 오시던 모습. 그 사색이 된 얼굴. ‘아이고야, 뱀 나왔는 줄 알았다.’ 가슴을 쓸어내리시며 짓던 안도의 웃음.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들은 이런 것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본 할아버지의 엄한 면은 당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늘 스스로에게 엄격하셨다. 건강 보조제를 챙겨 먹는 일이나 녹내장을 방지하는 안약을 넣는 것도 매일 같은 시간에 빼먹는 법 없이. 세차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오래도록 안과 밖을 모두 구석구석. 덕분에 10년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의 흰색 소나타는 늘 새 차처럼 광택이 났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셋이 같이 목욕탕에 가는 날엔, 나와 할머니는 서로의 등을 다 밀어주고 나와서도 할아버지를 기다려야 했다. 본인을 씻는 일은 세차보다도 오래 꼼꼼히 하셨으므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실 때마다 빛나던 깨끗한 이가 생각난다.



그러한 엄격함의 일환으로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늘 신문 스크랩을 하셨다. 그때만큼은 내가 심심한 티를 아무리 내어도 놀아주지 않으셨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할아버지’하고 떼쓰듯 부르면 ‘할아버지 신문 본다.’ 하시거나 그저 묵묵히 계속 읽으실 뿐이었다. 여섯 살의 나는 그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이 된 나는 그때의 할아버지처럼 신문을 읽고 기사를 스크랩한다. 그러다 보면 종종 나만 보기 아까운 글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기사 사진을 찍어 그들에게 바로 카카오톡 메시지로 보내기도 한다. 이것 좀 봐. 이렇게 좋은 글이 있다. 너도 같이 알았으면 좋겠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다 문득 할아버지가 내게 중학생 때 즈음 보내주셨던 편지가 떠올랐다. 겉면에 ‘비에게’라고 쓰여 있는 단출한 흰색 봉투 안에 잘라놓은 신문 조각이 몇 장 들어있었다. 성공한 인물의 인터뷰나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담은 것들이었다. 제대로 읽지 않고 편지를 모아두는 상자에 넣어 두었다. 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다시 찾아보고는 ‘이런 거 말고 손 편지를 써주시지.’ 하고 아쉬워했다. 아침 스크랩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던 여섯 살.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나서야 그 흰색 봉투에 담긴 마음을 안다.




할머니,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

상한 이마를 짚으며 할머니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중략)


창밖의 나무가 수초처럼 흔들리는 저녁

물이 뚝뚝 흐르는 몸으로 의자에 앉아

폭풍우가 휩쓸고 간 방 안을 읽는다

그런데 할머니, 어디 있어?


구석으로 내몰린 빛 속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파닥거린다

창문을 열자 빠르게 헤엄쳐가는


나는 침묵의 우산을 쓰고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中 <묵독 연습>



“비야. 니 인터넷에 여기 WWW가 무슨 뜻인지 아나?”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첫 번째 W는 월드다. 더블유. 오. 알. 엘. 디. 세계라는 뜻이고-.” 할아버지는 신이 나서 알려 주셨다. 할아버지는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셨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활용하여 가끔 내게 이메일도 보내시곤 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거라.’ 같은, 역시나 새삼스럽지 않은 내용들을 담아서. 할아버지가 없는 세상에도 새로운 것들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가끔 궁금해진다. 지금까지 건강하셨더라면 나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자주 보내주셨을까. 어쩌면 신문기사를 ‘캡처’ 해서 보내셨을 수도 있겠다. 스물여섯 살이 된 나를 여전히 강아지라고 부르실까. 그때처럼 ‘다 잘 될 거다.’ 말해주실까. 답을 받을 수 없는 물음들을 던져 본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으니, 그를 묵독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겠거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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