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샬 May 25. 2020

인도 '레'에서의 끔찍한 첫 날

핸드폰은 안 터지고 머리는 아프고

레(Leh)는 인도에 오기 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스무 살 때 처음으로 본 인도영화 <세 얼간이>의 엔딩 장면에 나온 푸르른 판공초의 모습부터, 인도어과 선배들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여행 사진까지. 레는 나에게 곧 인도였고, 인도는 곧 레였다. 그만큼 레 여행은 나에게 필수 버킷리스트였다. 나는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레 여행을 꿈꿨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한편, 레에 가기 위해서는 육로 길이 열려야만 한다. 길은 눈과 얼음으로 막혀 있는데 날씨가 따뜻해져야만 이 길이 녹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레 여행을 한다고 하면 6월에서 9월 사이를 적기로 본다. 하지만 길이 녹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차로 가는 방법 외에 하나의 방법이 또 있기 때문이다. 그 것은 바로 비행기로 가는 것이다. 나는 6월 말에 레 여행을 미리 계획해놓은 상황이었고, 혹여라도 길이 막혀 레에 가지 못할 것에 대비해 미리 비행기 티켓을 끊어놨다.


레로 가는 비행기에서 바라본 히말라야 산맥


레를 비행기로 가는 방법의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고산병'이다. 레는 해발 3,500m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고산병에 걸릴 위험이 상당히 크다. 고산병이란 말그대로 높은 고도에서 저산소 상태에 노출됐을 때에 겪는 어지럼증 등의 병을 의미한다. 보통 수도인 델리에서 레까지 차로 가려면 대략 50시간 정도가 걸린다. 이 경우에는 서서히 고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몸이 적응할 시간이 주어진다. 물론 차로 가는 사람에게도 고산병이 올 수 있지만 비행기에 비해서는 드문 편이다. 반면, 비행기로 가는 경우에는 갑자기 고도가 높아진다. 델리에서 레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는 몸이 쉽게 적응하기 어려운, 굉장히 짧은 시간이다.


나는 고산병에 대비해 미리 약을 사놨다. 델리의 한 약국에서 레에 간다고 말을 했고, 고산병을 위해 먹으면 좋을 약을 추천받았다. 한편, 고산병을 위한 약 중에 특이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아그라다. 비아그라가 무슨 약인가. 남성들의 정력을 위한 약 아니던가. 그런데 이 경우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때 청와대가 비아그라를 구매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아그라의 고산병 예방 효과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비아그라를 복용하면 혈관을 확장시켜 산소가 빠르게 공급돼 고산병 증상을 완화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비아그라를 판매하는 화이자에서는 "국내에서 유통되는 비아그라는 발기부전과 폐똥맥 치료제로만 허가받았을 뿐 고산병 예방약으로는 사용이 허가되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비아그라가 어느 정도 고산병을 예방하는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고산병 예방용 약품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레 공항의 멋진 풍경


아무튼 나는 준비한 고산병 약을 먹고 비행기에 탔다. 비행기는 소형이다. 주변 승객들은 대부분이 인도인이다. 이륙하고 잠깐 졸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웅성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비행기 옆에 있던 창문을 바라본다. 그것은 내가 여태까지 보고 싶어했던, 레의 장관이었다. 그 순간만으로도, 나는 내가 레에 온 것이 너무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만약 이 광경을 보지 못하고 한국에 돌아갔다면 크게 후회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레에 방문하지 않고 한국으로 그냥 갔다면 이런 풍경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한편, 비행기에서 내리자, 뭔가 머리가 멍한 느낌이 든다. 산 정상 등의 높은 곳에 올라가면 귀가 멍멍해지듯이, 귀도 멍멍하고 머리도 멍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높은 곳에 왔으니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익숙해지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고산병 약도 먹었는데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있는 삼엄한 공항에서 수속을 마친 뒤,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했는데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부터 시작됐던 두통은 멈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귀의 멍멍함은 풀리지 않을뿐더러 속 또한 좋지 않았다. 너무 어지러워서 도저히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서둘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침부터 침대에 철퍼덕 누웠다. 설상가상으로 핸드폰도 터지지 않았다. 레에서는 전파가 불안정해 핸드폰의 데이터가 잘 터지지 않는다. 어떤 때는 잘 터지지만, 어떤 때는 아예 먹통일 때가 있다. 심지어 먹통인 상태가 며칠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핸드폰의 데이터는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상황이었고, 벽돌이 돼버린 내 핸드폰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결국 핸드폰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아버린다.


숙소에서 바라본 레의 풍경


레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부터 시작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레 여행이지만, 먹통이 돼버린 핸드폰과 고산병으로 인해 먹통이 된 내 몸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돼버렸다. 그렇게 몸 상태는 최악이었지만, 생각보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레에 와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라이 라마의 마을, 맥그로드 간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