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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되고 깨우친 미국식 교훈 - 글을 마치며

삶의 지혜 - 00

by 명형인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커피를 한잔 내려 조용한 밤을 만끽하면서 제가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람은 원래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제 멋대로인 존재라서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순수한 진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추억들이 제가 살아오며 형성한 가치관과 만나 새롭게 정제되는 결론들도 온전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내가 기억하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할지라도 그 안에 가치관이 녹아있고 나만의 삶의 정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글은 투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기억은 투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20대에 느낀 점과 30대가 되어서 느낀 점 들이 확연히 다릅니다. 이렇게 제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달라지는 묘미를 즐기고 있습니다.


글을 읽으니 제 이미지가 어떻게 느껴지나요?


독자들 생각이 궁금하긴 합니다. 항상 좋은 평가는 없다고 생각해요. 살면서 저를 좋게 평가한 사람도 있지만 혹평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숨은 생각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치는 글에 제가 왜 "서른 되고 깨우친 30가지 교훈" 시리즈를 시작했는지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배경을 알고 읽는 글이 배경을 모르고 읽는 글 보다 낫다고 생각하나, 잘못하면 스포일러를 줘서 글의 재미를 깨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담하게 프롤로그를 없애고 에필로그를 선택했습니다.


에필로그가 이 시리즈를 다 읽은 독자들에게 개운한 상쾌함을 주는 디저트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만 12세 나이에 미국으로 비자발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귀가 안 들리는 날것의 한 덩어리 같은 저를 열심히 주물러서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으로 미국유학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고생하셔서 저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해 주신 것은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거는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들과 안 좋은 추억들을 떠나서 부모님이 저를 위해 희생하시고 능력이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영끌해 저를 미국으로 보내신 건 명백한 진실입니다. 이 사실에는 자식으로서 감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 글을 쓰지도 못했을 거니까요. 그리고 부모님께서 실제로 진짜 열심히 사셔서 저희 가정 형편이 많이 좋아진 시기였습니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가지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미국으로 처음 갔을 때에는 대성통곡하고, 학교에서는 언어가 안 통하고 전부 다 영어로 말하니 무서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는 수신호뿐이었으니까요. 알파벳도 초등학교에서 배웠는데 전부 다 기억나지 않고 머리가 새하얘졌습니다. 제가 쓸 수 있는 철자가 우습게도 A-P-P-L-E 하고 C-A-T 같은 간단한 단어뿐이었습니다. 이 단어를 가지고 필사적으로 애플! 애플! 캣! 거리면서 나 이거 안다고 말하는 동양인 여자아이는 어떻게 보였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저도 살아남으려고 나름 필사적이었습니다.


학교 점심시간에 친구들 무리에 너무너무 끼고 싶었거든요. 영어를 못하니 깨질 못했는데 생존법을 알아내니 점심 친구도 자연스럽게 생기고 학교 생활도 무탈히 해냈습니다. 대학교도 우여곡절로 졸업하고 부모님과 완전히 변해버린(?) 저는 거의 매일매일이 싸움이었습니다. 한국인 부모님께는 제가 한국인이지만 한국스럽지 않고 항상 뒷골이 당기는 존재였습니다. 저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제가 부모님과 생각보다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명령하는 것과 이거를 해야 한다 하면 안 된다를 뒷받침하는 라테를 듣는데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한국어로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죠. 이건 한국에서 사는 청각장애인들에게 두드러지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청각장애아동인데도 부모님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며 큰 아동하고 귀가 안 들리고 부모님과 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대화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같은 청각장애인 친구들과 수화언어로 대화를 나눈 아동은 성인이 되면 어마어마한 문화차이를 보입니다.


저도 다른 점으로 인해 부모님과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전반적인 제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미국으로 가서 영어를 새롭게 배워야 했는데 성인이 되고 대학 졸업한 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한국을 제대로 배워야만 했습니다. 아직도 저에게 한국은 익숙하면서도 언어는 날것의 존재입니다.


보통 외국인이 한국으로 들어오면 한국문화를 배우고 한국적인 것을 흡수해 대한외국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게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적응한 외국인들은 한국에 남지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들은 언론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거나 다시 본인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후자에 가까운 성향의 인간입니다. 한국 문화에 녹아들려고 저의 미국 정체성을 어느 정도 누르고 한국의 정체성을 받아들여 한국인답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주변에서도 저에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 한국문화를 네가 받아들여야 살기 편하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5년이 딱 지나니 제가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짧은 카톡을 보내게 됐습니다.


엄마, 나 우울증이 왔어. 정신과 치료받고 약 먹어야 할 거 같아.


그때 저희 어머니께서 엄청 발칵 뒤집어지셨습니다. 그때 당시 이혼하시고 어머님께서 생활에 적응을 완전히 하기 전이였는데 제가 대뜸 우울증이 심한 것 같다고 자발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겠다고 말했으니 제 어머니는 당연히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셨습니다. 저에게 무슨 상황인지 계속해서 몇 번 물어보시고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제가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담담하게 힘든 일들을 잘 견뎠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 많이 힘들어하고 울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저에게 처음으로 쓴소리를 못하셨습니다.


그렇게 정신의학과에 가게 될 뻔한 즈음에 예비남편이 저에게 제안했습니다.

이제부터 한국사람으로 살기를 그만두고 미국인으로 살아봐. 이제 요리도 네가 잘 먹는 미국요리로 하고 편하게 살아. 나는 네가 약을 먹는 거는 좀 신중하면 좋겠어. 나는 네가 미국인으로 살면 왠지 다 나을 거 같은데 한번 시도해보고 나서 차도가 없으면 그때 우울증 상담받는 거 어때?


내가 네가 요리 한 미국식 스튜 얼마든지 먹어줄게.
김치에 흰쌀밥 아니어도 괜찮아.


예비남편도 크게 결심한 듯이 저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네가 이제부터 한번 미국인으로 살아보라고, 눈치를 보며 한국인처럼 살려고 끼워 맞출수록 내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게 자기가 너무 고통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때 오빠의 한마디가 저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제 쌀밥에 김치, 김치찌개는 그만 먹으리고 네가 좋아하는 미국요리를 하면 나도 한번 미국을 맛보겠다고 건네준 손이 저를 어둠에서 건져냈습니다.


물론 중간에 많이 싸웠습니다.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와 정서적인 부분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노력을 하고 맞춰갔습니다. 저는 그렇게 점점 다시 원래대로 제 모습으로 돌아갔고 2년간 커플상 담을 같이 받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저는 우울증 약을 먹지 않았고 잘 극복해 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30살이 된 기념으로 브런치에 내가 30살이 되면서 배운 것들을 30화를 매거진으로 써보자 라는 큰 포부가 생겼습니다. 제 큰 포부는 중간에 개인적인 어려움이 닥쳐 연재 중단으로 약 2년간의 공백기를 맞이했지만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다시 재개했습니다. 저는 지금은 만으로 32살이지만 글을 고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내가 공백기간을 가진 사실도 그대로 보여주자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원래 미국에서도 실수를 하는 걸 보여주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수를 재치 있게 기회로 삼는 전술에 능한 사람이니까요. 생각보다 공격적인 면이 있어 치고받는 싸움도 잘하고 그럼에도 평화를 추구해 상대방이 실수를 해도 모른 척 평온히 넘어가기도 합니다. 사실 이게 미국의 자본주의적인 면모와 서비스 마인드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상당히 미국적인 부분이 많이 녹아든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통해 받은 한국적인 마인드도 어느 정도 갖고 있습니다. 눈치가 아직도 많이 약하지만 "눈치"라는 결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점은 저에게 강점이 되고 있습니다.


"서른 돼서 깨우친 30가지 교훈"을 써 내려가면서 저도 마음의 치유를 얻었고 나 자신을 다시 한번 정립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교포들도 비슷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저는 좀 더 나 자신을 보존해 한국에서 미국에서 살아온 것처럼 자신감 있고 무례하지 않되 유쾌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제가 단단한 모습으로 살아내면 분명히 비슷한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과 닿게 될 것이니까요.


이 긴 시리즈를 정독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ps. 저는 상당히 맵습니다. 매콤한 글을 쓰면서 최대한 순화시키고 "여기는 한국이니까 자제하자" 끊임없이 되뇌면서 글을 많이 다듬었습니다. 제 노력이 보이셨다면 저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


어디선가 이 글을 보고 여전히 뒷골 당겨할 제 예비남편께 감사를 담아 사랑을 보냅니다. 그가 이 글을 보면 여전히 이 글이 맵고 한국정서에 안 맞다고 저를 잔뜩 걱정할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에 힘들게 왔는데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공격당해 힘들어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니까요. 이 글을 보게 되면 부디 고개 끄덕이고 윙크해주세요 ;P


https://brunch.co.kr/brunchbook/30slifeles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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