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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부너부 Dec 15. 2018

《아테네의 변명》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반추해볼 때마다 종종 들었던 의문이 있었습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아테네는 도시국가 발전 과정에서 왕정이나 과두정을 배격하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시민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민주정을 선택했습니다.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고 일정한 재산을 지니고 있는 아테네 태생 자유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공론장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아테네인들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테네 사람들은 어째서 당장 내일 세상을 떠도 이상하지 않을 칠십 노인에게 사형을 언도해야 했을까요? 그것도 '젊은이를 현혹했고, 다른 신을 섬겼다'는, '죽을 죄'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보이는 죄목으로 말이지요. 제 의문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책이 제 의문에 준 답은 간단히 말해 '사회적 인내심의 한계' 였습니다. 기원전 399년 당시의 아테네인들에게는 지배적인 가치관과는 다른 생각을 설득력 있게 설파하며 적지 않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 노인을 참아줄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플라타이아이 전투도. 기울어져 가던 2차 페르시아 전쟁의 균형추를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쪽으로 완전히 돌려놓은 일전이었다.


  1세기에서 반세기 정도 전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지도 모릅니다. 당시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 전체를 유린하고자 했던 페르시아 제국과의 혈투에서 스파르타와 함께 최전선에 섰습니다. 두 폴리스는 그리스의 구심점이 되어 그리스가 전쟁의 최종승자가 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스파르타의 전사 300명은 개전 초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군의 진군을 틀어막았고, 아테네는 마라톤, 살라미스, 플라타이아이 전투 승리의 중심이었습니다.


  너무도 거대하고 부유해서 제국 자체가 하나의 '세계'라고 여겨질 정도로 강대했던 페르시아와의 사투에서 살아남았고, 거기다 승리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그리스 세계 전체에 하늘을 찌를 듯 한 자부심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쟁 수행을 주도하며 서로 그리스의 맹주를 자처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자긍심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두 도시  국가는 전쟁이 끝나자 다른 도시 국가들을 규합하여 각각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창설했습니다. 같은 세력권 안에 두 명의 패자가 있을 수 없듯, 두 세력의 충돌은 언젠가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아직까지 행운의 여신은 아테네 편에 있었습니다.

그리스 세계 내 아폴론 신앙의 중심지이자 금융 허브였던 델로스 섬의 전경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된 아테네는 안보 보장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국가들로부터 공물을 걷고 인력 동원을 요청하는 등 통제력을 키워 갔습니다. 인구는 늘었고 상업발전으로 국고가 두둑해졌습니다. 게다가 실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군대까지 보유한 아테네는 외부로 팽창하며 최초의 '민주주의 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페리클레스가 집권하던 기원전 5세기 중엽까지 그리스의 신들은 분명히 아테네의 번영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기원전 5세기 중엽, 20여 년간 '스트라테고스'로 재직하며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이끈 페리클레스의 흉상

  그러나 서서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계속되는 갈등은 결국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스파르타 군의 침략 때문에 교외의 인구들까지 성벽 안에 수용하며 지나치게 인구 밀도가 높아진 아테네는 전염병의 습격 앞에서 속절없이 수많은 시민들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페리클레스도 있었습니다.


  전세 역시 결코 아테네에게 유리하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국지전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던 아테네는 국면 전환을 위해 당대의 명장이자 인기인으로 유명했던 알키비데아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멀리 시칠리아로 대규모 원정군을 파병합니다. 그러나 야심차게 추진됐던 이 원정은 2년 후 처참한 재앙으로 끝나게 됩니다. 본국과의 알력다툼으로 알키비데아스가 스파르타로 망명한 후 우왕좌왕하던 원정군은 시칠리아와 스파르타 연합군의 공세 앞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실패는 치명적이었습니다. 동지중해 최강으로 이름 높았던 아테네 함대는 붕괴되었고, 원정군 5만 명 또한 공중분해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멜로스 학살 사건 등으로 아테네가 신봉하던 민주주의 역시 결국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며 위신이 손상된 아테네는 군사력까지 상실하며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와의 최후의 해전에서 참패하고 델로스 동맹이 사실상 해체된 후 성벽까지 포위당한 아테네는 결국 항복을 선언합니다.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강력했던 제국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민주정을 해체하고 친스파르타인으로 구성된 과두정을 꾸리게 했습니다. 이들은 곧바로 잔혹한 복수에 착수했습니다. 여전히 민주정을 신봉하거나 과두정을 비판한 이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암살당했습니다. 당연히 이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고, 아테네 시민들은 무력 궐기 끝에 민주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이렇게 아테네 시민들이 끝없는 전쟁과 패전을 거치며 피폐해지고 심지어는 그들의 자랑이자 우월한 정치원리라고 믿었던 민주정을 잠시나마 상실했다가 막 되찾은 시기에 열렸습니다. 공동체가 탄탄대로를 걷고 있을 때에는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고 간혹 거슬리기까지 했던 소크라테스의 언동에 겉으로나마 미소를 지어 주던 아테네 시민들이 이제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그토록 자랑스러웠던 아테네가 어째서 이렇게 몰락하게 된 것인지 책임을 뒤집어 씌울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아테네인 들에게 세상에서 자기보다 지혜로운 이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소크라테스, 막강한 군대 유지나 신에게 경배하기 위한 호화로운 사원 건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웃어넘길 수 있는 '괴짜'가 아닌 '사상범'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재판에 넘겨졌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 《아테네 학당》에서 묘사된 소크라테스


  이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학문 분야의 연구 성과를 효과적으로 끌어 왔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크라테스 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내렸던 델포이 신전의 구조와 유래를 언급할 때나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의 재료였던 독당근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읽을 때면 역시 역사학은 상상의 학문이고 한계가 없다는 점을 여실히 깨닫게 됩니다. 덤으로 물질과 외모에 대한 숭배가 판치던 당대에 소크라테스의 존재가 던진 파장을 가늠해보고 또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명성과 영향력이 유지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지 숙고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2018.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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