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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연 Dec 17. 2018

[인터뷰] #2. 배우 정인지 (1)

PROJECT #1 - 여성 공연인 릴레이 인터뷰

한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해달라는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세상이 평화로워지는 것이 꿈인 사람’이라고 대답한 그녀. 매거진 [연] <여성 공연인 릴레이 인터뷰>의 두 번째 인터뷰이는 바로, 배우 정인지입니다. 공연을 마치고 재충전을 위해 긴 여행을 떠나기 전날, 그녀를 만나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행운이었습니다.
2018년 가을 국내 초연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에서 정인지는 ‘앙구스티아스’가 베르나르다 알바 집안의 장녀로 삼십구 년간 살아온 단조로운 인생과, 어느 날 찾아온 젊은 청년의 구애로 인해 품게 되는 희망 그리고 욕망을 너무나 실감나게 보여주었죠. 무대 위에서 앙구스티아스를 살아 숨쉬게 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매 질문마다 진중하게 또 열정적으로 답변을 해주신 덕에 <베르나르다 알바>의 추억을 비롯해 사람으로서, 여성으로서, 배우로서 정인지가 지닌 여러 고민과 생각들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갈무리하여 담은 이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저 또한 ‘나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에 깊이 동감하기에, 그녀의 삶과 이 인터뷰를 읽고 계신 여러분들의 삶에도 평온함이 깃들기를 기원해봅니다. 여행 조심히 즐겁게 잘 다녀오시길!




"영주 언니께서 모든 배우들에게 선물해 주신 펜이에요." - 정인지



Q. <베르나르다 알바>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는지.

작년에 우란에서 공연되었던 <순수의 시대>를 하며 (정)영주 언니를 만났어요. 영주 언니와 피디님들께서 이 작품을 올리기 위해 꽤 오랜 기간 동안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으셨는데, 그때쯤 ‘이제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한 번 해보자’ 하셨대요. 저는 플라멩코, 탱고 등등에 대해 이름은 들어 봤지만 정확히 각각이 무엇이고 그 차이점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근데 이런 공연이 있다?’ 하시면서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여주셨어요. ‘여자 열 명이 나와. 그런데 여자들이 플라멩코를 춰. 그런데 심지어 이제 로르카 희곡이야. 그런데 이게 뮤지컬이야. 이걸 우리나라에서 공연할 거야,’ 하시는데 저는 이미, ‘주문 완료!’ 이런 느낌이었어요. 사실 그때는 ‘내가 이걸 할 수 있겠다,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아니라 ‘보고 싶다’였고요.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정말 멋있고 매력 있는 여배우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사람 열 명이 무대 위에서 땀 흘려가며 춤을 추고 공연을 한다면 안 볼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그냥 봐야 되는 거죠. 그리고 제가 상상해봤을 때 배역에 매칭이 되는 배우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들이 하시면 너무 좋겠다, 보러 가고 싶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주 언니에게 공연은 안 해도 되니 일단 플라멩코는 같이 배우고 싶다고 말했어요. 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지만, ‘일단 스케줄은 비워놔야겠다.’ (웃음) 그랬는데 공연을 하게 된 거죠.


Q. <베르나르다 알바>의 대본과 음악에 대해
처음에는 저희가 로르카 대본을 많이 보기도 했는데, 뮤지컬로 바뀌었을 때의 느낌은 많이 다르잖아요. 그 안에 포함된 요소들도 다르고요. 라키우사는 배우들을 그림자로 쓰고 싶어 했어요. 대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가 그녀들의 목소리를 많이 대변하잖아요. 음악적으로는 정말 ‘변태’가 아닌가 싶었어요. (웃음) 손드하임의 수제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둘이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밖에 없단 느낌이 정말 많이 들었어요. 손드하임도 라키우사도 공통점이 음악을 배울 때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서로를 음을 들어서 되는 음정이 하나도 없고, 저희끼리 배우면서도 ‘진짜 이게 맞아?’ 그랬어요. 그렇게 어렵지만 완성된 음악을 들었을 때는 전혀 문제가 없고 오히려 정박인 것도 같은 느낌, 굉장히 쉬어 보이는 느낌이 있어요. 좋아해요. 재밌잖아요. 나중엔 우리 음악만 들어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고 이것저것 이야기하려는 수다쟁이 같아서 너무 귀엽고 재밌더라고요.


Q. <베르나르다 알바> 속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와닿을 수 있던 이유가 있다면
로르카는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만큼은 어떠한 과장된 연기적, 표현적 설정을 넣어 상징적인 캐릭터들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공연하기를 못 박아놨어요. 그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증폭되고 사람들이 내용을 정확하게 볼 수밖에 없게끔 하기 위해서요.
이게 거의 백 년 전에 쓰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동질감을 느껴요. 그가 당시 프랑코 독재 정권에 대한 사회적인 이야기를 쓰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약자인 여자들의 이야기였다는 것은 정말 영특하지만, 아마도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아닐 거예요. 물론 아주 공교롭게도 그 둘이 완전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긴 하지만요.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고민을 하는 거니까요. 그걸 드러낼 수 있는 로르카만의 방법이 글쓰기였을 거고요. 어쨌든 그녀들의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혀 생소하거나 구닥다리처럼 느껴지지 않죠.


Q. 앙구스티아스의 캐릭터를 만들어 나간 과정이 대해
연습하며 만났던 앙구스티아스와 극장에 들어와 런을 돌며 만났던 앙구스티아스는 많이 달랐어요. 극장에 오기 전까지는 캐릭터가 너무 강했어요. 연습 영상을 봐도 제가 그렇게 하고 있더라고요. 부끄러웠어요 정말. (웃음) 그때는 맏딸인 앙구스티아스와 막내 아델라 사이에 존재하는 19살의 나이 차이가 보여야 한다는 생각과 이 인물이 왜 이런 말들을 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고민이 너무 많은 나머지, 주변 인물과 환경 속에서의 조화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연습실을 나와 극장에서 런을 돌다 보니, ‘앙구스티아스가 이렇게까지 센 성격이면, 서른아홉 살이 되도록 이렇게 있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연성을 전혀 못 찾았던 거예요. 그제서야 그녀 또한 베르나르다의 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억압받는 상황에서 다섯 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의견을 표출하는데, 너무 강한 방식을 선택했던 거죠. 고민하던 찰나에 조연출님과 국희의 도움으로 지금의 앙구스타아스를 만났어요.


Q. 앙구스티아스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지? 폰시아는?

앙구스티아스는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혹은 엄마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앙구스티아스를 낳았을 때 그녀의 엄마도 너무 어렸고 자기 인생을 살아나가기 급급했을 테니까. 엄마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그걸 어떻게 갈구해야 하는지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뭔가 경험해봐야 갖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죠. 앙구스티아스한테는 아홉 살 때 환경이 바뀌고 새로운 가족이 생길 때까지는 비교의 대상조차 없었어요. 아홉 살이면 거의 다 자란 거잖아요.
사실 공연을 하면서 연기 파트너로서 만나는 영미 언니의 폰시아는 너무나 기대고 싶고 손잡고 싶고 모든 것을 다 용서해줄 것만 같은, 마치 엄마와도 같은 느낌이에요. 하지만 아까 말했듯 앙구스티아스는 엄마의 사랑이란 것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폰시아를 엄마 대신으로 생각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꿩이 위협을 느낄 때 머리만 감추는 것처럼, 앙구스티아스가 외면하거나 도망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폰시아는 눈을 찡긋하며 알아줄 유일한 사람이죠. 앙구스티아스를 뒤로 숨겨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만, 그렇다고 폰시아에게 너무 의지를 많이 해버리면 앙구스티아스가 너무 어린아이처럼 보일 수도 있어서 고민이 많았어요.


Q. 앙구스티아스에게 페페는? 사랑은?

앙구스티아스는 행복해지기 위해 페페가 진심이라고 믿어야 했어요. 이 사랑을 믿어야만 이 집을 나갈 수 있으니까. 집을 벗어나는 것이 페페로 인해 새롭게 생겨난 목표는 아니에요, 예전부터 지니고 있던 오랜 목표죠. 그래도 사랑이라는 감정이기에 앙구스티아스의 심장도 뛰게 만들었을 거예요.


Q. 앙구스티아스 삶과 그녀의 욕망에 대해

지금의 제가 봤을 땐 앙구스티아스의 삶이 너무 갑갑해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삶이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린 시절 내내 그렇게 집 안에서 지냈기에 지극히 당연한 일상인 거죠. 딸들이 집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건 엄마의 가부장적인 강압이 부추겼기 때문이에요. 베르나르다 알바가 주는 그 강압적인 통제가 극 내에선 짧게 쓰였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긴 시간일 테니까요. 그런 집안에 갇혀서 삼십구 년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살아갈 거라 생각하고 있던 앙구스티아스 앞에 어느 날 갑자기 한 젊은 남자가 나타나요. 새아빠가 죽고 또다시 8년 상이 시작되면서 ‘그래 난 애초에 내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난 이미 순결을 잃은 몸이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난 곧 나갈 수 있을 거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그것이 그녀에게 큰 작용을 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갑자기 그런 기회가 생기니까 이 구속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나도 뭔가 저 남자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분칠도 하고 머리도 넘겨보고. 꽉 막힌 옷이지만 어떻게 내 가슴팍이라도, 단추 하나라도. 이런 나 자신에게 놀라지 않았을까요. 나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발견하게 된 거죠. 페페가 어떤 남자인가는 앙구스티아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거예요. 


Q. <베르나르다 알바>, 원 캐스트와 팀워크에 대해

전부 원 캐스트였으니까 모든 추억의 순간들에 모든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다 보니 모두가 약속을 알고 연기해요. 공연을 하면서 이렇게 배려가 많은 공연은 처음이었고, 또 이렇게 막공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도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그 고민이, 캐릭터에 대한 ‘이게 설득력이 있나?’ 하는 고민이었어요. (김)국희의 연기도 매일 느낌이 달랐는데 매번 장면을 끝내고 들어올 때마다 항상 물어봐 줬어요. 정말 사소하게 부딪히는 씬에서도요. (김)히어라는 프루덴시아와의 모임 때 건네주는 음료까지도 그날 그날의 디테일로 가져갔어요. ‘오늘은 국화차, 오늘은 미숫가루. 오늘은 따뜻한 쌍화차.’ 그럼 각자 캐릭터의 성격에 맞춰 연기하는 게 나름의 재미였죠. 다들 그게 마지막까지 너무 행복했고 재밌었고… 아, 너무너무 좋았던 기억이에요. ‘다른 공연에서 우리가 또 이렇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것이 단순히 ‘여자만 있어서 편했는데 다른 데 가서도 편하고 싶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원 캐스트여서 가능한, 또 이 사람들이어서 가능한, ‘정말 이렇게 고민하며 연기할 수 있을까?’ 싶은 그런 기억들이었어요.


Q. <베르나르다 알바> 공연 중 앙구스티아스가 아델라를 붙잡다가 넘어진 날도 있었는데

저희가 목걸이부터 의자부터 사고가 많았잖아요. 하지만 사고를 사고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 그것도 이 배우들과 했기에 가능했어요. 모두가 서로를 백 프로 믿어요. 이곳에서 어떠한 사고가 일어나도 그걸 사고처럼 여기지 않는 것, 이건 앞으로도 느낄 수 있는 기분이 아닌 것 같아요.
목걸이 보석들이 떨어진 날, 그 누구도 줍자고 약속하지도 않았고 – 그럴 틈도 없었지만 – 누구 한 명도 동요하지 않았어요. [관객들이 가장 당황했죠. (웃음)] 그 와중에 (황)석정 언니는 보석을 조금이라도 덜 떨어트리려 목걸이를 움켜쥐고 있었어요. 그것도 튀지 않게. 노래 부르는 사이에 같은 고민을 하고, 짠 것도 아닌데 암묵적인 동의로 의자 동선을 끝내놓고 줍겠다고 모두가 마음을 먹은 거죠.
공연 후반부 앙구스티아스가 아델라와 맞붙는 장면을 할 때마다 항상 조심스러웠던 게 저희가 신었던 구두가 앞코 끝에 징이 달려있어요. 그래서 찍어서 소리를 내는데 그 장면은 아델라를 밀고 가야 하잖아요. 게다가 아델라는 맨발이니까 발을 밟을까 봐 안전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상체를 앞으로 해서 엉거주춤 밀었어요. 그날은 순식간에 엉켜 넘어졌는데 너무 미안한 거예요, 모두에게! 하지만 배우들 모두 공연이 끝나고 저와 (오)소연이가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다들 실제로도 그렇게 격렬하게 싸웠을 것 같다고 얘기하더라고요. 


Q. 첫공 커튼콜과 막공 커튼콜 소감은?

첫공 커튼콜을 잊을 수가 없어요. 첫공을 마치고 들어와서 저희 모두가 다 부둥켜안고 울며 ‘이거 이상한 공연이야,’ 했어요. 너무 감격이었어요. 모두를 너무 사랑해요. 그 첫공 커튼콜을 하고 나서 ‘내가 이 아홉 명의 배우들을 너무 사랑하는구나, 이 사람들이 너무 좋고 이들과 공연을 하는 게 너무 감사하다,’ 이런 생각으로 너무나도 충만했어요. 열 명 모두가 이처럼 서로의 에너지를 정확히 분배하면서 이렇게 공연을 할 수만 있으면, 이런 사람들과 공연을 할 수만 있으면… ‘음, 그래도 삼 개월은 지겨울까?’ 그랬어요. (웃음) 영미 언니가 이렇게 100퍼센트 이해받았다고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슬픈 얘기잖아요, 언니가 공연계에 지금 몇 년을 계셨는데.
개인적으로 막공 커튼콜은 오히려 담담했어요. 어떠한 아쉬움도 남기고 싶지 않았어요. 게다가 앞으로 또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2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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