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 Feb 18. 2021

 노부부의 침실

블론디와 대그우드 부부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읽을거리가 별로 없어서인지 아침에 배달되어 오는 신문을 유독 더 기다렸다.

아침 일찍 마당에 나가 신문을 주워 들고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리는 그 짧은 순간에 만화를 후다닥 볼 수가 있어 추운 겨울날에도 나는 신문 가지러 나가는 담당을 자처했다.  

고바우 영감과 두꺼비보다 먼저 읽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미국 만화 블론디는 그 이국적인 분위기에 심취해 매일 기다렸었다.


그러고 보니 블론디와 대그우드 부부의 일상을 전해주던 그 신문이 지금도 발행되고 있나 싶게 종이신문 냄새 맡아본 지도 오래되었다.

4컷짜리 만화에는 블론디와 대그우드 부부의 침실 배경이 자주 등장했는데 부부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대화하는 장면이 참으로 근사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당시 우리는 온 가족이 한 방에 모여 포개어 잠을 자던 시절이었다.

블론디가 핸드백을 엄청 싸게 샀으니 돈을 번 셈이라고 말해 벙 찐 얼굴로 끝나는 대그우드의 표정이라던가 침대에 누워 TV를 보며 티격태격하다가 블론디가 멋진 드레스를 득템 하게 되는 장면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의 시선으로 봤을 때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장면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재벌을 소재로 하는 TV 드라마쯤 되려나?


결혼을 하면서 처음으로 침대를 샀을 때가 생각난다.

남편은 다른 생각(?)으로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블론디 만화가 먼저 생각났다.

드디어 나도 그들처럼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 책을 읽다가 덮으며 스탠드 불을 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 만으로도 한껏 사치를 부리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더블사이즈 침대를 사는 것만으로도 황송했는데 세월이 갈수록 좁게 느껴져서 자연스레 퀸사이즈로 바뀌었다.

중년의 나이가 지나니 주변에서 잠자리 불만이 들리기 시작했다.

젊은 날에는 분명히 좁은 침대에서도 꼭 껴안고 잠들었을 그들이 옆에서 코를 골아대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둥, 옆에서 뒤척거려 깊은 잠을 잘 수가 없다는 둥 투덜거렸다.

아예 각방을 쓰던가 아니면 트윈 침대로 바꾸어 각자 편히 숙면을 취한다는 커플들도 많아졌다. 심지어 우리 부부가 아직도 한 침대에서 잠잔다고 하니 불편해서 어떻게 잠을 자느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침대가 좁게 느껴졌다. 내가 젊었을 때보다 살이 쪄서 그런 것만도 아닐 것이다.

하긴 침대와 화장대만 들어가 있는 넓은 안방인데 좁은 침대 위에서 아옹다옹 서로 이불 끌어당겨가며 잠을 설칠 필요가 있겠나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때 맞춰서 TV에 얼핏 옛날 영화 '자이언트'가 보였는데 에리자베스 테일러와 록 허드슨의 침실 장면이었다. 부부가 각자의 침대에서 책을 보다가 스탠드 불을 끄는 것을 보고 평생 블론디의 침실 장면에만 꽂혀있었던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오랜 세월 멀쩡하게 잠자던 침실 분위기를 바꾼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방을 쓴다는 게 어쩐지 상징적인 다른 의미 같기도 해서 상대의 기분을 먼저 헤아려야 할 일이었다.

친구 중에 남편이 암에 걸려 수술을 했는데 치료를 좀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서재방에 침대를 들여놓고 자신의 잠자리를 옮겨갔더니 무척 서운해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고 보면 각방을 쓰는 타이밍도 신중해야 하나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중 남편과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호텔에서의 잠자리가 무척 편했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 5성급 호텔은 더블사이즈 침대 두 개를 합쳐놓아서 두 사람이 각자의 침대에 자면서도 한 침대에서 자는 듯 결속력 있으면서도 편안했다.  

그 후 침대를 넓히기 위해 이것저것 궁리를 했다. 약 5, 6년 전쯤에 새로 들여놓은 침대를 또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싱글 사이즈를 사다가 기존의 퀸사이즈에 갖다 붙였더니 딱 들어맞았다. 그게 패밀리 사이즈란다.

좀 더 일찍 생각했더라면 마지막 침대 바꿀 때 퀸사이즈 대신 호텔 침대처럼 더블 사이즈 두 개를 들였을 것인데, 내가 블론디 부부의 그림에 너무 집착했었나 보다.

어쨌거나 넓은 침대로 바꾸는 것에 대해 은근 남편 눈치를 봤었는데 그건 기우였다. 침대가 넓으니 너무 편안하다며 큰 대자로 누워 자는 남편에 배신감마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넓은 패밀리 사이즈가 된 침대에 벌렁 누워 뒹굴어보니 두 침대 사이에 작은 틈이 걸렸다. 결과적으로 누구는 퀸사이즈에 누구는 싱글에 누워야 등이 배기지 않는 것이다. 둔한 남편은 별로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아 내가 편한 쪽을 찜했는데 마음은 불편해진다. 이게 우리 부부의 마지막 침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네 인생의 1/3을 보낸다는 침대인데 앞으로 보낼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아무래도 좀 더 사치를 부려봐야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다. 더블 침대 두 개를 새로 사겠다는 말이다.



만화 '블론디'는 작가 칙 영에 이어 그 아들 딘 영이 대를 이어 연재한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본 만화는 칙 영 작가였을 것이다.

만화 블론디를 회상하면서 검색을 하다 보니 내가 얼마나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는지 알겠다. 하긴 국민학교 2, 3학년 짜리 계집애 눈에 비친 세상이라니.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격리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