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손으로 넘길 때마다 흰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온다. 몇 개는 손가락으로 잡아당겨 뽑을 수 있을 만큼 길다. 한국에서 아빠가 뽑아줬던 흰머리가 자랐나 보다. 파리에서 짙은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가 좀 밝아 보인다. 적응한 건지, 아니면 원래 피부 색으로 돌아오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애틀은 낮 최고 기온이 20도인 날이 많다. 꽤 도톰한 겉옷을 챙겨 입어야 한다. 휴가에서 돌아온 것이, 여름이 끝나가는 것이 실감 난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환상적이었다. 25년 지기 친구 결혼식을 핑계 삼아 한국에 갔다 왔다. 오랜 꿈이었던 부모님과의 선상 낚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했다. 한국에서 돌아온 지 3주도 안 되어 올림픽을 보러 파리에 다녀왔다. 비치 발리볼 경기를 직관하다 중계 카메라에 잡혔고, 폐막식에서는 톰 크루즈를 가까운 거리에서 봤다.
파리에서 돌아오고 나서 좀 힘들었다. 평소라면 가볍게 넘길 수 있을 만한 것들이 거슬리고 짜증 나고 화가 났다.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시끄러운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 기껏 기운 내서 한 아침 인사를 무시한 버스 기사 아저씨, 지나가는 사람의 잘못 말린 빨래 냄새 등.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하며 애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티가 얼마나 났는지 엄마 아빠가 통화 중에 곧 생리하냐고 물었다. 회사 동료는 매일 아침 나를 찾아와 내 상태를 확인했다. 걱정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진짜 괜찮냐고 물어보면서.
내가 우울하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다. 무기력해져 집안은 엉망이 되었고, 단순한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기본적인 일도 못 해내는 내가 한심해서 더 우울해졌다. 악순환을 깨기 위해서는 환기가 필요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뜨끈한 물 맞으며 멍때리는 샤워를 하기로 했다.
샤워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울한 기분이 드는 건 주기적으로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제는 체크리스트로 만들 수 있을 만큼의 고정 질문이 있다.
생리 전 증후군인가? 아니다. 복용하고 있는 피임약을 보면 가짜 약까지 한참 남았다. 월경전불쾌장애 증상을 개선하기 위해 야즈를 꾸준히 먹고 있다. 한 상자에 일곱 알씩 네 줄, 28일 치 약이 있다. 몇 년간 관찰한 결과 대체로 세 번째 줄의 약을 먹기 시작할 때 우울한 시기가 온다.
날씨 때문인가?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다. 아직 시애틀 여름이 남았겠거니 하고 파리에서 돌아왔는데 너무 춥다. 흐리고 비가 온다. 다시 한번 시애틀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인간관계가 힘든가? 아니다. 부모님, 남자 친구, 친구들, 직장 동료 등등 문제없다.
직장에서는 문제가 없는가? 혼란한 시기다. 2주 만에 다섯 명의 동료가 팀을 떠났다. 내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팀원에게 들었다. 상사에게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말이다. 확인하고 싶지만 상사는 휴가 중이다.
다른 힘들 만한 일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난 몇 달간 전속력으로 달려왔던 것 같다. 큰 이벤트가 연달아 있으니까 실수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여행 가기 전에는 여행 준비한다고, 여행 가서는 여행에 집중한다고 다른 생각을 못 했다. 계속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한꺼번에 사라져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려서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여행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다. 아직도 짐 가방은 그대로, 사진은 찍기만 했지 정리는 하나도 못 했고, 글도 쓰다 말다 했다.
샤워를 마치고 제일 좋아하는 잠옷을 입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을 적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서 엉켜만 있던 생각을 하나씩 풀어 화면 위에서 보는 건 내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1. 냉장고 안에 있는 오래된 갓 피클. 아마도 상했을 것 같은데 확인하기 두렵다.
2. 개수대 안에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
3. 설거짓거리를 넣으려면 비워야 하는 식기 세척기.
4. 아직도 다 못 푼 짐 가방.
5. 침대 밑에 고여 있는 먼지들.
6. 사방에 늘어져 있는 옷가지들.
7. 가득 찬 쓰레기통.
8. 먼지 쌓인 창틀.
9. 파리에서 깨끗하게 못 빨고 온 수영복.
10. 화장실에 늘어져 있는 다 써가는 샴푸, 린스, 바디 스크럽, 치약.
11. 회사 동료에게 들은 내 새 프로젝트. 상사에게 들은 바가 없어 일을 시작해야 하나, 뭘 해야 하나 감 잡기가 어렵다.
12. 종일 유튜브만 보는 한심한 나.
그리고 각각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적었다.
1. 오래되었으니 버리기. 비운 그릇 헹구고 식기 세척기에 넣기.
2. 식기 세척기 비우기.
3. 설거짓거리를 식기 세척기에 넣기.
4. 하루에 한 개씩이라도 정리하기.
5. 청소기로 밀기.
6. 하루에 한 개씩이라도 정리하기.
7. 출근할 때, 또는 퇴근하자마자 비우기.
8. 물걸레질하기.
9. 샤워할 때 빨기.
10. 제일 빈 것부터 공략하기. 그리고 하나씩 버리기.
11. 다음 주면 상사가 돌아오니 그때 물어보는 걸로. 그전까지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알아라도 두고, 지금 하는 일 잘하기.
12. 넷플릭스에서 영화나 드라마 한 편씩이라도 보기. 아무래도 하나씩 끝내는 맛이 있으니 유튜브 조각 영상 보는 것보단 허무함이 덜할 듯.
생각만 하던 것을 정리해 보니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것 아닌 걸로 힘들어한다고 자책하기보다는 이렇게라도 마음을 다잡고 우울을 극복하려는 자세를 가진 나를 칭찬했다. 하나씩 성취감을 느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힘이 나니까. 모든 것을 하루 만에 하기에는 벅차 보였다. 그래서 각각의 해결책을 가장 작은 단위로 쪼갰다. 짐도 한 번에 다 정리하려고 하지 말고 옷 한 벌씩, 기념품 하나씩 짐에서 빼기. 가방이 조금씩 비워지면 기뻐하기.
이렇게 우울하거나 허무하거나 혼란한 시기는 또 찾아올 것이다. 이제는 그런 시기를 애써 막으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조금 괜찮은 상태일 때 그런 우울한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만들어 둔다. 가장 적은 에너지로 내 상태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계적으로 답만 하면 되는 질문지 만들기.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을 떠올릴 수 있는 공식 만들기. 그리고 전속력으로 달린 뒤의 우울감과 허무함을 달래기 위한 취미 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