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디나+라바트 다음 행선지는 몰타 서쪽의 해변으로 정했다. 몰타 남쪽 해안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주로 있고 서쪽은 모래사장이 있는 바닷가가 많다. 유명한 해안가 중 하나인 골든베이를 걸어서 15분 거리에 갈 수 있다는 설명이 적힌 숙소가 눈에 띄어서 이곳을 예약하고 이동했다.
네번째 숙소가 있던 한적한 마을
숙소에 도착하니 여기도 또 완전 시골이다(라바트 숙소 이전에 잡은 사피도 외지인이 거의 없는 지역). 주위에 편의점도 없고, 가게가 하나 있긴 한데 주말엔 문을 닫는다(나는 금요일에 도착해서 주말을 여기서 보냈다). 가장 가까운 시내는 도보로 30분 정도면 갈 수는 있는 거리인데, 인도가 없어서 무조건 버스를 타야 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디 몰타에서의 대부분을 관광객이 주로 안 가는 지역으로 잡게 됐다. 그리고 이 덕분에 오히려 여행에 대한 좋은 기억이 더 많이 남게 된 것 같다.
1박에 25유로짜리 숙소. 가성비가 너무 좋았던.
일단 숙소의 퀄리티가 가격 대비 정말 훌륭했다. 이 해안가 숙소는 일박에 25유로였는데 정말 만족스러웠다. 게스트하우스여서 원래는 욕실을 공용으로 쓴다고 하는데 극성수기(보통 6~8월이 성수기이고 나는 3월 말~4월 초에 왔다)가 아닐 때 온 덕분에 투숙객이 나밖에 없어서 혼자 썼다.
몰타 남쪽 사피 근처
이틀 밤 잤던 사피 숙소도 1박에 3만 원대 정도의 숙소였는데, 가격 대비 정말 훌륭했다. 숙소에 '맨션'이라고 적혀 있길래 가보니 정말 수영장 딸린 영화에 나오는 그런 맨션이다 ㅎㅎ. 호스트 아저씨가 아직 수영장에 물을 못 채워 미안하다고 하신다ㅋ 여기서도 투숙객이 나밖에 없어서 호스트 가족은 이층을, 나는 1층을 혼자 썼다. 몰타 오기 직전에 런던에서 이 가격의 2.5배를 주고 정말 극한 주거 체험을 하고 온 뒤라(진짜 도시의 주거 환경의 열악함을 온몸으로 느꼈고, 그래도 서울은 런던에 비해서는 주거 환경이 상대적으로 균질한 편이란 걸 절감함) 몰타의 숙박 가성비는 더 감동적이었다.
사피 숙소 근처 풍경
하루 3만원대에 맨션 숙박 체험을 해봤다
여행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마주쳤다.
사실 몰타 도착 첫날 발을 나름 심하게 다쳤었다. 히드로에서 비행기가 2시간 연착을 했고, 원래대로면 몰타에 6시쯤, 그러니까 해지기 전에 도착하는 거였는데 8시가 넘어서 도착하게 됐다. 모르는 지역에서 혼자, 해 진 후 캄캄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바라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몰타 루카 국제공항 문밖을 나가 맞닥뜨린 첫 인상도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남쪽 나라라서 따뜻할 줄 알았는데 바람이 생각보다 너무 거세서 추웠다(런던보다 추웠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차가 많고, 너무 쌩쌩 달리며, 인도를 찾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숙소까지 걸어서 15분 거리였는데, 일단 횡단보도를 찾느라 헤맸고, 이후엔 횡단보도는 있지만 신호등이 없는 길을 건너야 했다. 2차선 도로인데도 차들이 고속도로처럼 달려서 어떻게 건너가야 하나 당황스러웠던 길들을 몇 번 지나, 숙소 근처 마지막 차도를 건널 때 결국 일이 생겼다. 어두운 길을 급히 걷다가 길을 다 건넜을 때쯤 움푹 파인 곳에 발을 디뎌서 오른쪽 발이 삐었는데 좀 심상치 않구나 싶었다(어렸을 때부터 발을 하도 자주 삐어서 삐었을 때 심각한 건 지 아닌 지 느낌이 있는데 뭔가 싸했다).
숙소까지 절뚝거리면서 어떻게 체크인을 했는데 숙소 도착하고서 발이 점점 부어오르는 게 보였다. 내일 아침에 부디 좀 가라앉길 바라면서 잠이 들었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새벽에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잠도 설치고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몰타 여행이 이렇게 시작도 못하고 끝나는 건가 싶어 당황스럽다가 한편으로는 그래도 숙소 근처에서 다친 게 다행이란 생각도 들면서 최악 이어 봤자 여행을 못하고 돌아가는 것뿐이니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숙소에 있다가 그때 상황을 봐서 돌아가든지 계속 여행하든지 하자, 고 마음을 정리했다.
둘째 날, 일단 1박만 결제한 이 숙소를 연장해야했다. 최소 사흘은 더 있어야 걸을 수 있겠다 싶어 호스트 아저씨에게 사정을 말씀드리면서 2박 연장이 가능한 지 여쭤봤더니 괜찮다고 하신다. 이 사정을 설명하다가 내 발 상태를 직접 본 호스트 아저씨가 놀라서 필요한 게 없냐고 계속 물으신다. 얼음찜질할 수 있는 걸 부탁드렸더니 냉찜질 팩이랑 얼음을 가져다주셨다. 혹시 진통제가 필요하냐고 먼저 물어보셔서-마침 가져간 게 곧 떨어질 것 같아서-감사하게 받았다.
식사는 어떻게 할 거냐며 뭐 사다 줄 게 없느냐고 물으시길래 제일 기본 식사빵 하나만 사다 주실 수 있냐고 했더니, 스프레드는? 치즈나 햄 같은 것도 사다 줄까? 하신다. 뭔가 좀 민폐인 것 같아서 가져온 잼 같은 게 있어서 괜찮다고 사양했더니 그럼 일단 로컬 브래드를 사 가겠다고 하신다. 잠시 후에 아저씨가 빵 한 봉지랑 라면 비슷한 걸 함께 사 오셨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사 왔다고 하시는데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 빵 값을 드리겠다고 했더니 안 받겠다고, 빨리 푹 쉬고 나았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필요한 것 있으면 뭐든지 얘기하라고 거듭 물어보신다. 정말 감사했다.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사다주신 라면. 마음이 정말 감사했다.
2, 3일째 결제한 숙소에서는 이러저러해서 숙박을 이틀 미룰 수 있겠냐고 연락했더니 역시 흔쾌히 얼마든지 괜찮고 얼른 낫기를 바란다는 답장이 왔다.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어떻게 해보자,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점점 편해졌다. 침대에 누워서 태블릿에 저장해뒀던 밀린 책 읽기, 몰타에 대한 것들 읽기-이게 나중에 여행할 때 도움이 많이 됐다-를 하면서 쉬었다.
이틀째까지 걷는 건 아직 어려웠지만, 발이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오후, 잠시 자고 일어났더니 확연하게 발 상태가 괜찮아진 걸 느꼈다. 혼자 샤워하고 슬슬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급 회복이 됐다-몸의 회복력이 정말 신기했다-시험 삼아 동네 슈퍼에 다녀와 봤는데, 예정한 대로 다음 날 체크 아웃은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하루 정도 후엔 거짓말처럼 말끔히 나았다. 이후 걷는 건 물론 하이킹도 전혀 무리가 없을 만큼 발은 완전히 나았다.
이틀 연장을 수락해준 두 번째 숙소에서도 호스트 아저씨 덕에 시골 인심을 만끽했다. 사피에서 태어나서 그 동네에서 쭈욱 살고 계신 분이었는데, 체크인 한 날 베이컨이랑 햄을 한가득 사 가지고 들어오시면서 내일 아침을 해주고 싶어서 사 왔다고 하신다(에어비엔비에 조식 포함 이런 문구도 없었는데). 첫 번째 아침은 일찍 나가서 아침을 못 먹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사양했고, 둘째 날 아침을 먹었는데 정말 상다리 휘어지게 먹었다. 이것저것 더 해주신다고 했는데 그나마 가짓수를 많이 줄여서 가장 간소한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영국에서도 안 먹었던 ㅎㅎ)를 먹었다. 특히 이때 먹은 몰티즈 소시지가 진자 맛있었다. 영국에서도 에어비엔비로 많이 다녀봤는데, 체계적이고 독립적인 게 딱 보장되는 그런 숙소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물론 몰타에서도 유명 여행지는 영국이랑 비슷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업으로 하는 분들이 운영하는 에어비엔비도 많다).
몰타에서 먹은 잉글리시브랙퍼스트, 아저씨가 이 양의 거의 3배 가까운 아침을 차려주려 하셔서 많이 줄인 게 이 정도다.
네 번째 숙소인 이 서쪽 해안가 마을에선 소소하지만 선물 같은 일들이 하루 동안 두번 있었다. 하이킹하러 가던 길에 휴대폰 넣을 수 있는 작은 가방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목적지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이 시골마을에 주말에만 하는 플리마켓이 등장했다. 옷, 가방 같은 것들을 파는데 딱 내가 찾는 휴대폰 넣을 수 있는 작은 가죽 가방을 판다. 나름 메이드 인 이탈리 가죽 가방이다. 가격은 3유로. 색상을 결정 못하고 둘 중에 고민하고 있으니까 아주머니가 두 개 사면 5유로라며 영업을 하시고 나는 결국 두 개를 다 사게 됐다. 이 가방은 여행 중 두고두고 잘 썼다.
가방이 필요하던 차에 띡 하고 등장한 주말 플리마켓. 마침 딱 필요한 크기의 가방을 저렴하게 팔고 있었다.
같은 날 저녁엔 과일이 먹고싶었는데 근처에 슈퍼가 없는 동네라 어디서 사야 하나, 내일 버스타고 큰 동네로 가볼까 하다 일단 바닷가에 일몰이나 보러가자 싶어 밖으로 나갔다. 가던 중 트럭에 좌판을 깔고 과일을 파는 노점을 만났다. 딸기, 오렌지, 귤, 토마토, 사과 등등. 박스 단위로 파는 것 같아서 낱개로도 살 수 있나 기웃거리다가 오렌지, 토마토를 한 개씩만 살 수 있냐고 여쭤봤더니 아주머니가 끄덕끄덕 하신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오렌지랑 토마토를 넣어주시더니 그냥 가져가라고 하신다. 그냥 가져가라고요? 되물으니까 그렇다고, 혹시 들고갈 백이 필요하냐고 들 수 있는 봉투까지 챙겨주신다. 오렌지 사기 전에 귤이랑 오렌지랑 뭐 살지 고민하면서 만지작 거렸는데 귤도 가져가라며 여기에 토마토도 하나도 더 넣어주신다.
오렌지 하나만 먹었으면 했는데 정말 오렌지가 갑자기 뚝 떨어졌던 이날.
고조섬에서 2박을 했던 숙소의 호스트 아주머니도 투숙객들 챙겨주는 걸 매우 즐거워하시는 분이셨다. 원래 이 숙소를 하숙집처럼(근처에 영어 교육원 같은 데가 있어서 독일, 스페인, 러시아 등에서 영어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 많다고) 운영하다가 팬데믹 이후엔 에어비엔비로 여행객들을 받고 있는 듯 했다. 아주머니가 아침을 몇시쯤 먹을 것 같냐고 물어보셔서, 다음날 일찍-늦어도 아침 7시쯤-나갈 것 같은데 너무 일찍 준비하셔야 하니까 아침을 준비 안 해주셔도 괜찮다, 고 했더니 그럼 런치 도시락으로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놓으면 네가 편하겠냐고 하신다. 그렇게까지 안해주셔도 되는데 아주머니가 절대 거절을 안 할 거 같으셔서 그렇게 해주시라고 했다. 그 다음날 일어나보니 거의 새벽 6시대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계시다가 내가 7시쯤 나가려고 하니까 도시락 싼 걸 주신다. 나는 돌아와서 받겠다는 의미였는데 가기 전에 준비를 ㅠㅠ 게다가 도시락 양이 내 기준 두 끼는 될 샌드위치, 과일, 요구르트 패키지다. 체크아웃 할 때도 시간이 살짝 안맞아서 좀 늦게 나가도 되냐고 문의했더니 시간은 전혀 신경쓰지 말고 충분히 쉬다가 편할 때 가라고 하신다.
몰타에 와서 내내 따뜻하고 위로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어찌보면 소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마주침들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대목 중 하나였다. 그러고보니 인심이란 말 자체를 뇌리에서 끄집어낸 게 언제인가 싶은데-언어도 경험을 해야 상기가 되는 건데 인심이란 걸 경험하기가 쉽지 않으니까-몰타에 와서 이 단어를 꽤 자주 자주 떠올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