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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웅 Dec 29. 2022

리얼리스트의 꿈

1장 꿈 이야기

소년이었을 때, L은 빨리 어른이 돼서 서울행 기차를 타리라고 다짐했다. 아버지는 매일 저녁, 술에 취해 들어왔다. 노비 출신 여자를 첩으로 들여 문중에서 쫓겨난 할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부친 때문에 생면부지 땅에서 가난뱅이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술로 달랬다. 아버지가 벽에 머리를 찧는 주사를 시작하면 L은 집을 빠져나와 뒷동산에 올랐다. 느릿느릿 기어가는 포유류처럼 멀리 불빛을 싣고 달리는 밤 기차를 보며 언젠가는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날 거라 생각했다. 종착역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L은 그 기차가 자신을 서울로 데려다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허망하게 무너져버린 집안을 다시 일으킬 거라는 야망을 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L의 꿈은 더 강렬해졌다.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가난 속에서 행상과 반 마지기의 남의 논농사로 고달픈 삶을 사는 어머니를 보면서 L은 서글펐다. 그때마다 그는 뒷동산에 올라 멀리서 가고 있는 기차를 보며 서울 가는 꿈을 또 꾸곤 했다.      


“어쭈쭈, 우리 L 철들었네?”

열여섯 살 그 애는 L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참이나 더 나이 많은 누나처럼 말했다. 그 애는 자기도 서울에 같이 가겠다고 했다. L은 그 애의 말이 장난이라고 여겼는데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넌, 가지 못할 거야. 너한텐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L이 말했던 것은 그 애 부모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L에게는 서울에 가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 애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갈 수 있어. 나도 갈 거야.”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불가능하니까.”

“가능해.”

“왜 그렇게 장담을 해?”

L의 물음에 그 애는 잠시 침묵하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너랑 함께 갈 거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자. 그럼 돼.”


L은 꿈을 확장했다. 서울 가는 기차를 그 아이와 함께 타는 것으로. L은 이전보다 훨씬 활기찬 아이가 됐다. 여전히 가난 속에서 허덕이는 어머니를 보는 게 힘들었지만 꿈을 생각하면서 견뎌냈다. 더욱이 그 애와 함께 간다는 상상을 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공부에 더 열중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는 길이 L의 꿈을 이룰 유일한 방법으로 여겼다. 불가능하게만 생각했던 일이 그 애와 함께함으로 가능한 꿈이 됐다.      


카페를 차리기로 마음을 굳히자 그쪽으로의 열망은 급속도로 커져갔다. 주변 사람들은 세 패로 나누어졌다. 잘될 거라며 환호하는 사람, 어려운 시기에 사업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 침묵을 새로운 신조로 삼기라도 한 듯 가타부타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으로.

절대 통일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세 패가 처음으로 의견을 일치시키는 기적을 일으켰다. 카페 장소 덕분이었다. 주차 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동네에, 그것도 2층이라는 것에 사람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전망 좋은 은파호수변이거나 도심 밖 한적한 곳에 해야지 왜 하필 이런 곳이냐며 따지고, 조언하고, 사정했다. L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건이 좋지 못한 곳에서 성공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좋은 곳에서 성공한다면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경영 능력은 인정받지 못할 것 같았다. 악조건 속에서 성공할 때 사람들이 자신의 진가를 알아줄 것이라고 L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L을 향해 ‘꼴통’이거나 ‘또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L은 그 무렵 일기에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분수도 모르고 주제 파악도 못 한 얼치기 이상주의자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굳이 체 게바라를 소환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그러면 내 말을 우습게 알 수 있으니까 그를 데려와야겠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

체 게바라가 말한 ‘리얼리스트’를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현실적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손님이 많이 갈 것 같은 장소에 카페를 차리는 것이 현실주의라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입지 조건이 좋지 못한 곳이지만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리얼리스트가 아닐까. “리얼리스트가 되자”는 말 뒤에 붙은 ‘그러나’ 접속사는 빼버리는 게 좋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모든 몸짓이 리얼리스트가 하는 것이니까. 꿈은 언제나 불가능해 보이는 게 맞다. 현재 능력으로는. 지금 가능한 일은 꿈이 될 수 없다. 리얼리스트인 우리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면서 가능으로 바꾸는 것이다. 분명 체 게바라도 그런 의미로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말고.』


L은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를 전설이 되게 하고 싶었다. 수십 년 전의 음악다방에 관한 추억을 말하듯 자신의 카페도 훗날 사람들이 그렇게 기억하기를 바랐다. 돌이켜보면 꿈도 참 비만이었다. 꿈을 크게 가지라던, 이름도 알 수 없는 선현의 뜻을 받들기는 했지만, L 자신이 생각해도 꿈이 야무진 것을 넘어 천하장사급이었다. 

L은 카페 <음악이야기>를 음악감상카페의 롤 모델로 만들 것이라는 야심 찬 꿈을 안고 오픈 준비에 들어갔다. 그 무렵 L은 크랜베리스(Cranberries)의 <Dreams>를 많이 들었다. 노랫말에서 사랑의 대상을 카페로 바꿨다. 난생처음 하는 카페 사업에 대한 막막함 속에서도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 꿈은 실현될 것이다. 안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돌로렌스 오리오던(Dolores O'Riordan)이 허망하게 죽기 전이었던 그 시절, 그가 부르는 꿈 노래를 L은 듣고 또 들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꼭 이루고 싶은 리얼리스트의 꿈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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