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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 Jun 18. 2023

합정역 소개팅남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따로 있을까?

 덜컹덜컹 드르륵 덜컹덜컹 드르륵



 합정역을 향하는 지하철 2호선에 나는 몸을 싣고 있다. 얼굴도 모르는 소개팅남을 만나러. 사진 한 장 없이 이름, 나이, 직업, 사는 곳 정도 간략한 프로필만 주선자에게 받았다. 만나기 전 카카오톡으로 약속장소와 일정을 정하기 위해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 내심 기대했는데, 그의 프로필 사진엔 풍경사진만 가득했다. 이건 반칙이지, 난 내 사진이 프로필 사진인데. 혹시 못생겼나?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자기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못 올리나?


 소개팅남의 본가는 서울이지만 춘천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서른이 넘은 이후, 물리적 거리를 이기고 사랑을 쟁취할 에너지가 나에겐 남아있지 않다.


 오랫동안 이성을 만나지 않으면 연애세포가 점점 말라가기에. 이번 만남은 잠시나마 나의 연애세포를 소생시키기 위한 응급처치 정도라고나 할까?


 그와 만나기로 한 곳은 합정역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그 장소는 그가 서치하여 알려준 식당 세 곳 중 내가 고른 곳이다. 피렌체에서 살다 온 셰프가 운영하는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고 한다. 그래, 혹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즐겁게 맛있는 거 먹고 오자.     


 손목에 채워진 시계의 바늘이 12시 55분을 가리킨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시간은 1시. 합정역까지 한 정거장, 지하철에서 내려서 약속장소까지 도착하기엔 빠듯한 시간이다. 아, 아무래도 조금 늦을 것 같다. 미리 연락을 해둬야겠다.


 휴대폰을 가방에서 꺼내려는 순간, 그 소개팅남에게 전화가 온다. 아직 첫 만남을 가지지도 않았는데, 목소리를 먼저 듣게 되다니. 연애세포 응급처치용 만남이라지만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네 메리씨, 저 오늘 뵙기로 한 문군입니다."


"아, 네 마침 좀 늦을 것 같아 연락하려던 차인데."


"아, 그러신가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좀 문제가 생겨서 연락드렸습니다."


 아직 첫 만남도 하지 않았는데 문제라니, 물론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번에도 글렀나.


"저희 오늘 만나기로 한 장소가 예약을 안 받는 식당이라, 제가 12시부터 와서 기다리는 중인데요. 그래도 앞에 줄이 조금 있어서, 20-30분 정도 더 대기해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 아뇨, 죄송하다뇨. 예약이 안 되는 곳인지 몰랐네요. 그럴 줄 알았다면 다른 곳으로 갈걸… 그렇게 일찍 나와계실 줄 몰랐어요. 저는 좀 늦게 도착하는데 죄송하네요. “

 휴... 장소 선정부터 난관인 것인가. 부담스럽게 말도 안하고 일찍나와서 기다리고…


 소개팅에서 성공할 것 같을 때 느껴지는 나만의 직감이 있다. 그것은 초반의 기류이다. 나와 그 사이를 간지럽게 해 온몸의 세포를 긴장하게 만들고 또는 말랑말랑하게도 만드는 그 기류 말이다. 

 첫 만남부터 술술 풀려도 잘 될까 말까 하는 판에, 이렇게 꼬이다니. 맥이 탁 풀린다. 장소 선정부터 꼬였으니 오늘 소개팅은 꽝이려나 보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서 제가 급하게 주변에 괜찮은 식당 알아보고, 사장님께 자리 하나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는데요.

혹시 메리씨는 웨이팅 후에 저희가 원래 만나기로 했던 곳으로 가길 원하시나요? 아니면 바로 입장 가능한 레스토랑으로 가실까요? “


.

.

.

쾅쾅쾅쾅쾅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뭐지 이 남자? 세심하네

꽝인 줄 알았는데

나 왜 이렇게 떨리지?


“… … 바로 입장 가능한 곳이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처음 보는 남자와 웨이팅을 하는 것보다 다른 식당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예, 그럼 합정역 7번 출구에서 기다릴게요. 만나서 같이 움직여요. “


 휴대전화 너머로 나와 그 사이에 긴장하게 만들고,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그 기류가 흐른다. 얼굴도 모르지만 세심하고 다정한 그에게 이미 훅 들어갔다. 그때부터 난 그를 사랑할 만반의 준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랑은 아니지만 서른이 넘은 이후, 꽤 많은 소개팅을 해봤다. 소린이(소개팅 어린이) 시절, 새로운 남자와 첫 만남 때 기대를 하고 나갔다가 실망한 횟수가 점점 쌓여가자 이젠 점점 내려놓게 되었다.

 기대를 내려놓으니 설레야하는 만남들은 내가 세운 조건에 맞는 남자를-벌이가 나보다 좋은 남자, 좋은 직장에 다니는 남자, 학벌이 좋은 남자, 운동과 독서가 취미인 남자, 인상이 좋은 남자, 다정한 남자, 무던하지만 공감능력이 좋은 남자- 골라내는 딱딱하고 건조한 구인인터뷰가 되어갔다. 내가 세웠던 조건에 들어맞는 남자들은 어딘가 삐걱거리며 대화 주파수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이제 내겐 더 이상 20대에 지나갔던 불같은 사랑은 오지 않는 것인가 씁쓸했다.


글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따로 있을까? 내 경험에 의하면 가치란 건 사랑을 함으로써 만들어지더라. 하기 전에 고려된다면 그것은 조건이 될 뿐.
-이석원, 언제 들어도 좋은 말-


 합정역 7번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 점점 바깥의 햇살이 설레는 내 발끝에 쏟아져 내린다. 합정역 7번 출구 앞에 다다르자 검정코트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키가 꽤 크고, 체격도 좋아 보이는 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주변을 서성이던 그가 뒤돌아 나를 본다. 그가 웃는다. 내가 웃는다. 웃을 때 사라지는 그의 눈이 꽤 귀엽다. 내가 말했던 그 초반의 기류가 우리 사이에 팽창하게 흐른다.


찾았다. 내 사람.



나는 그에게 두 번째 만날 때 꽃 한 송이를 선물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7개월째 연애 중이다.

 

 그의 앞에서는 내가 세웠던 조건들이 모두 무색해졌다. 그렇게 우린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주고, 다른 사람은 해 주지 못하는 이해를 해 줌으로써 오직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가치란,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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