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봉오동전투'의 가치와 비판점
MCN에서 인턴 생활을 하면서 유튜브 영상들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득 호흡이 긴 영상 콘텐츠들에 대한 갈증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특히 그 갈증이 심해져서, 주말 오전부터 집에서 뛰쳐나와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원래는 오랜만에 아르떼관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옷구경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맞는 영화가 ‘봉오동전투’ 밖에 없더라고요. 결국 그동안 애써 피하고 있던 ‘봉오동전투’를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자체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제가 비판해 마지않던 ‘명량’과 비슷한 느낌이었달까요. 크게세 가지 포인트를 꼽자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일기토와 무쌍으로 얼룩져 신빙성을 잃은 액션씬
이장하(류준열 분)에 집중된 신파와 그로 인한 개연성 파괴
지나치게 루즈한 편집
‘봉오동전투’에 대한 평론가들의 코멘트나 ‘영화 깨나 보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왓챠의 한줄평도 대체로 부정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용철 평론가는 이 영화를 희대의 망작 ‘사냥’에 비교하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봉오동전투’는 개봉 18일 째인 오늘 손익분기점을 넘을 것으로 보이며, CGV 골든에그 지수나 네이버 영화평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상업영화로서의 어느정도 목표는 달성한 셈이죠. 그래서 그런지 ‘봉오동전투’를 보고 난 후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봉오동전투’가 개봉했던 8월 초는,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해 촉발된 반일감정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영화의 흥행 스코어에 흔히 말하는 ‘시국빨’이 끼어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러나 시국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항일운동을 다룬 상업영화는 꾸준히 사랑받아 왔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암살’, ‘밀정’, ‘박열’, ‘동주’, ‘항거’ 등의 영화들을 꼽을 수 있겠네요.
저는 이런 영화들을 관람할 때, 작품성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항상 의문이 듭니다. (물론 의문만 가질 뿐 실제로는 가열찬 혹평을 여기저기 하고 다니지만요) 영화에 대한 수업을 들으면 항상 나오는 말이지만, 영화의 목적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니까요. 만일 영화가 상업적으로 일정한 성공을 거두면서, 잊지 말아야할 역사를 환기해주는 역할까지 한다면, 조금 못 만들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까요...?
뿐만 아니라 이런 영화들은 VOD로서의 가치도 지닙니다. 매년 8월 15일이면, ‘광복절 특선영화’로 여기저기서 어딘가에서 방송이 될 것이니까요. 그러면 1920년의 봉오동 전투는 누군가의 브라운관, 또는 모니터에서 생명력을 얻고 기억되겠죠. 작품성은 뛰어나지만 스크린에서 내려간 이후에는 잊혀지는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작품이 더 가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는 ‘봉오동전투’를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를 좀 풍겨봤는데요. 사실 저는 ‘봉오동전투’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극 중에서 이장하(류준열 분)가 어린 일본 병사를 사살하려 할 때 황해철(유해진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총 내려! 너 얘 쏘면 쪽바리 새끼들 하고 똑같아지는 거야.
그러나 ‘봉오동전투’는 자신이 뱉은 이 말을 지키지 못합니다. 영화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지점이 대부분 일본군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장면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유해진이 칼춤을 추며 일본 병사들을 베어내고, 포로 잡은 장교의 고환을 터뜨리는 장면/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앞뒤로 포위해서 몰살하는 장면 등에서 굳이 ‘통쾌함’을 느꼈어야 했는지 반문하게 되더라고요.
저도 일제가 우리나라, 더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서 얼마나 잔혹한 짓거리를 벌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에 대한 합당한 사과가 7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영화 속에서 일차원적인 악인으로 표현하고, 더 나아가 무참하게 죽임으로써 심리적 보상을 받는다면, 진짜 극중 유해진의 말마따나 ‘그 새끼들과 똑같아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그린 ‘덩케르크’가 왜 호평을 받았을까요. ‘급박한 상황에서 서로 다르게 흐르는 시간’이라는 연출에서의 주제의식과 ‘전쟁의 비극은 결국 누구의 몫인가’라는 내러티브에서의 주제의식을 세련되게 엮어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작정 독일군을 악의 축으로 설정하고, 슬로우모션으로 MSG를 팍팍 쳐가며 연출했다면 ‘덩케르크’라는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항일운동이나 6.25 전쟁 등 민족적 비극을 다룬 영화도 이제는 한층 진일보한 주제의식과 연출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항일운동을 다룬 영화를 ‘작품성’ 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단지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전쟁이란 비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영화예술을 통해서 더 심도있게 표현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는 ‘일본 안 가기, 일제 안 쓰기’라는 표어가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 그림과 함께 붙어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제 바람은 이 시국이 지나가야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네요. 지금이라도 일본 정부가 전쟁범죄에 대해서 책임있는 태도를 보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