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은 어떻게 <캡틴 마블>을 통해 사회적 마케팅의 영역으로 진출했나
* 이 글에는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근 <캡틴 마블>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전우주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결말을 맞닥뜨린 팬들은, 이 사태를 해결할 강력한 히어로인 ‘캡틴 마블’이 도대체 어떤 캐릭터인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캡틴 마블>은 트레일러가 공개된 이후부터 페미니즘 영화로 낙인 찍혀 별점 테러를 당하는 등,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개봉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서, ‘스크럴’ 종족의 상황을 통해 난민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플롯이 불편하다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결국 <캡틴 마블>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며 호평과 혹평 세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중이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차치하고 위의 논란만 놓고 말하자면, <캡틴 마블>이 시도한 패러다임 전환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변화를 ‘긍정적’이라고 말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이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히어로 장르야 말로,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국어 시간, 누구나 한 번쯤은 홍길동전을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라는 비련의 주인공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영웅이 된 홍길동은, 가히 우리나라 최고의 슈퍼히어로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개혁사상가였던 허균은 홍길동전이라는 대중오락소설을 통해 적서차별과 탐관오리의 횡포 등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어냈다.
이렇듯 영웅 설화, 요즘 말로 ‘슈퍼히어로물’은 그 사회가 마주한 문제들을 소재로 삼는다. 슈퍼히어로들이 온갖 초능력을 동원해서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고 권선징악을 완성할 때, 사람들은 현실을 살아갈 희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슈퍼히어로물의 존재 이유이자 가치이다.
따라서 슈퍼히어로물은 무엇이 우리 사회의 문제인지를 매력적으로 정의해야하는 과제를 떠안는다. 이 ‘어젠다 세팅’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고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슈퍼히어로의 본고장(?) 미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대내적 결속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은 DC나 마블 코믹스로 하여금,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외부세력으로부터 미국을 수호하는 ‘슈퍼히어로’들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미국을 위협하는 외부세력은 대부분 나치 또는 소련을 떠올리게 하는 빌런들로 묘사되었다.
예를 들어 ‘캡틴 아메리카’는 1941년 첫 코믹스에서부터 나치의 반대급부로 등장했고, ‘아이언맨’은 1963년 냉전이 극에 달했을 때 미국의 패권주의를 표방하며 탄생한 바 있다. 이러한 슈퍼히어로들은 절대악으로 표현되는 빌런들을 상대로 미국적 가치를 지켜왔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되고 세계가 다원화됨에 따라 이분법적인 선악구조는 설득력이 약해졌다. 이에 슈퍼히어로의 대척점에 있을 ‘빌런’은 과연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2010년대 영화들의 곳곳에 드러난다. 그 빌런들은 때때로 테러리즘을 표방하기도 했고, 인공지능을 대변하기도 했으며, '전우주의 인구문제를 고민하는' 헐리우드식 사고방식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빌런도 시리즈 수 편을 이끌어나갈 대의명분이나 매력을 가지지 못하면서 단명하고 만다.
<캡틴 마블>은 이러한 문제를 역설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영화에서 빌런은 ‘난민’으로 표현되는 스크럴 종족을 핍박하는 '전투민족' 크리 종족이다. 그런데 이 크리 종족이 상징하는 바가 이전 영화와 비교했을 때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등장하는 크리 종족은 뛰어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종족들을 정복해나가는 전투민족이다. 이들의 무자비함은 잔다르라는 ‘교양있는’ 문명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에 크리 종족의 수괴 로난이 주인공 태그 팀에게 죽음을 맞는, 권선징악적인 스토리라인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캡틴 마블>의 경우는 반대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크리 종족은 AI의 통치를 받는 교양있고 발전된 문명으로 묘사된다. 이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바로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스크럴 종족이다. 하지만 영화 중반, 야만적인 스크럴 종족이 사실은 크리 종족에 의해 고향 행성을 잃은 난민임이 드러난다. 주인공 캡틴 마블은 이 사실을 깨닫자 마자 크리 종족에서 돌아서서 스크럴을 돕는, ‘정의로운’ 모습을 보인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과 맞물려서 의미심장한 느낌을 준다. 크리 종족 자체는 ‘이민족을 억압하는 전투 종족’의 설정이 변하지 않았지만, 크리 종족이 상징하는 바는 완전히 변했기 때문이다. 가오갤에서 크리 종족이 미국(이 지향하는 가치관)에 반하는 전체주의 국가를 나타냈다면, <캡틴 마블>에서의 크리 종족은 미국(의 현실) 그 자체이다. 결국 ‘빌런 = 불의한 시스템 또는 정치권력’ 이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히어로 영화에서 관객들은 자신을 히어로에 동일시한다. 그러나 <캡틴 마블>에서는 관객들이 자신들의 사회가 크리 종족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에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히어로 영화의 문법에는 어긋나지만, 명확한 선도 악도 없는 현재의 사회적 갈등관계를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냈다는 점에서 히어로 장르가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2000년대 중반, 디즈니는 적극적으로 사회적 마케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디즈니와 계열사에서는 사회 이슈에 밀접한 어젠다 세팅을 통해서 바람직한 가치를 전달하려는 작품들이 제작되고 있다.
2009년 40억 달러의 금액으로 디즈니에게 인수된 마블 역시 마찬가지 행보를 보인다. 마블은 이미 ‘블랙 팬서’를 통해 히어로 무비의 틀 안에서 흑인영화를 구현하여 한 차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캡틴 마블>은 여성 히어로를 전면에 내세우며 히어로 무비의 유리천장을 깼다.
마블은 여성, 흑인 등 히어로 장르에서 등한시되던 집단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모티브로 차용하면서 사회적 마케팅의 영역에 다다르고 있다. 단순히 ‘우리 영화가 이렇게 멋져요’가 아니라, 자사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담론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상품에 담아내는 것이다.
인종과 성별을 주요 어젠다로 설정하면, 자연스럽게 이들이 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어려움 역시 내러티브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슈퍼히어로들이 이러한 허들을 뛰어넘어 보란듯이 성공하는 모습은, 히어로 무비의 주요 소비층인 아이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로 다가간다. 이러한 영화 한 편 한편이 쌓이면, 사회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트리거로 분명히 작용할 수 있다. 마블과 디즈니는 문화산업계 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물론 <캡틴 마블> 자체의 캐릭터 빌딩이 아쉽다는 지적에는 일리가 있다. 영화에서 캐럴 댄버스가 얼마만큼의 기억을 되찾아서 각성하게 되는 것인지는 지나칠 정도로 생략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캡틴 마블>이 제시해준 히어로 장르의 미래는 그 자체로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음 마블 영화인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서는 다시 ‘인구 빌런’ 타노스가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어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phase 4에서 영웅을 필요로하지 않는 세상에서 슈퍼히어로가 좇아야 하는 가치가 어떤 것일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