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리얼리티에 대한 고민과 ‘인지 중심의 1인칭 시점’
네가 한 번이라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 있어?
모두들 한 번쯤은 타인과의 갈등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들어봤음 직하다. 제 아무리 비범한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지각의 범위는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제한되어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재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는 ‘카메라의 눈’으로 이미지를 담아낸다. 따라서 사각 프레임을 구성, 연출하는 연출자의 주관이 자연스럽게 투영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재현 방식은 역사적 참상을 다룰 때 문제가 되기도 한다. 비참한 상황을 극복한 비범한 인간성을 조명하자니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왜곡한다는 비판이 따르고, 적나라하게 사건 자체를 묘사하자니 사건의 폭력성을 볼거리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이 따르기 때문이다.
라즐로 네메즈의 ‘사울의 아들’과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카메라와 인물의 시점을 일치시키는 실험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의 소재가 되는 참상을 직접 인지하게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관객들은 자신의 눈 역할을 하는 인물과 동일시하지 못하는데, 이러한 효과를 통해 사건을 왜곡하지 않고 리얼리티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번 글에서는 '사울의 아들'이 사용한 기법과 서사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겠다.
라즐로 네메즈 감독의 ‘사울의 아들’은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삼은 수많은 영화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주동 인물의 시점으로 현상을 보여주면서 인물 자체의 내러티브는 허물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일하는 유대인 노역자(존더코만도) ‘사울’은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소년의 장례를 치뤄 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카메라는 사울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종일관 좇아가는데, 이에 따라 관객들은 마치 아우슈비츠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러한 현장감은 라즐로 네메즈가 카메라를 진짜 '사울의 눈'처럼 만들기 위해 추가한 몇 가지 인위적인 요소를 통해 배가된다.
우선, ‘사울의 아들’에서 대부분의 씬은 사울의 뒷모습을 화면 중앙에 위치시키는 타이트한 바스트 쇼트를 사용한다. 따라서 프레임 내에 사울을 제외한 여유 공간 자체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영화가 고전적인 1.37:1 의 프레임 비율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배경이 묘사될 수 있는 공간은 한층 협소해진다.
좁디 좁은 프레임 안에서 사울을 제외한 모든 배경은 심지어 포커스 아웃돼서 흐릿하게 보여진다. 영화에서 상시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대상은 오직 사울 뿐이며, 주변 인물과 배경은 사울이 인지하지 않는 이상 포커스 아웃되어 있다. 이 흐릿한 영상은 앞서 말한 1.37:1 프레임의 둥근 가장 자리가 주는 효과와 합쳐져 마치 인간의 시야와 같이 느껴지게 된다.
이렇게 구성된 프레임은 사울이 움직임에 따라, 사울이 인지한 것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결국 관객들은 사울의 눈을 통해 상황을 느끼고 내러티브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를 ‘인지 중심의 1인칭 시점’이라고 부른다.
앞서 말한 화면 구성이 프레임을 인간의 눈처럼 만들었다면, 핸드헬드(또는 스테디캠)로 사울을 좇으며 롱테이크로 씬을 구성하는 연출은 관객들로 하여금 사울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도록 한다. ‘사울의 아들’은 한 화면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컷 전환을 최대한 자제하지만, 카메라는 사울을 뒤쫓는 와중에도 어느 순간 회전하여 사울의 표정을 잡는 등, 상황에 따라 사울의 감정을 충실하게 전달한다.
물론 ‘사울의 아들’에도 대화나 시선 처리를 위해 컷이 전환되어 사울이 정면에서 잡히는 씬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씬들 역시 클로즈업 쇼트로 길게 처리됨으로써, 사울이 인지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관객들이 ‘사울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오히려 사울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사울의 서사가 무너짐으로써 숨겨진 두 개의 서사가 드러날 수 있게 되는 트리거로 작용한다.
‘사울’은 아들이라고 믿는 소년의 장례에 집착한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이 처참히 짓밟힌 세상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붙잡기 위해 사울이 택한 방어기재이다. 그러나 사울의 집착은 오히려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동료들을 위험에 내몰고, 억울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적 요소가 주는 착시를 통해 사울의 시점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던 관객들은, 여기서 도덕적 혼란을 겪게 된다. 자신에게 인지 정보를 주는 주인공의 억지스러운 행동이 잘못된 결과로 발현되기 때문에, 일종의 가책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관객의 목표는 사울의 목표인 ‘장례’에서 멀어지게 된다.
사울의 집착은 멈추지 않고, 동료 존더코만도들의 반란을 실패로 내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소년이 사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강하게 암시되며, 사울이 찾은 랍비 마저 거짓이었다고 확인된다. 이렇게 훼손될 대로 훼손된 사울의 서사는, 사울이 결국 소년의 시신을 잃어버리고 독일군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사울의 아들’에는 ‘존더코만도의 반란’과 ‘제도적 제노사이드의 과정’이라는 2개의 내재된 내러티브가 추가로 존재한다. 두 개의 내러티브 모두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폭력성과 선정성이 메시지보다 부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메인 서사구조 아래에 숨겨져있다고 볼 수 있다.
첫번째 ‘존더코만도의 반란’은 사울이 소년에게 장례를 치러주려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파편적으로 드러난다. 사울은 이 반란에 관련되어 있음이 여기저기서 암시되지만, 영화에서 사울은 마치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 듯 반란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는 ‘존더코만도의 반란’ 내러티브가 메인 서사구조와 교차하면서도, 감독의 주관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이다.
두번째 ‘제도적 제노사이드의 과정’은 수용소에서의 사울의 업무와 영화 전반의 배경에서 아웃포커스된 채로 고발된다. 앞서 말했듯이 ‘사울의 아들’은 핸드헬드 쇼트를 통해 ‘열린 형식’을 구현하기 때문에, 학살의 과정은 프레임 바깥으로 확장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프레임 밖에서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더욱 거대한 규모로, 훨씬 선명하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두 개의 이야기는 시간 순서도 맞지 않고 대부분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지만, 영화가 마칠 때쯤이면 각각이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게 된다. 이에 따라 관객들은 목표달성에 실패하고 무너져버린 사울의 메인 서사구조보다, 종국에는 확실한 이야기 구조로 완성된 두 개의 내러티브를 기억하게 된다.
물론 관객마다 사울과의 동일시가 깨지는 지점이 다르고,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지식과 경험의 수준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왓챠플레이’에는 ‘플롯이 너무 단순하다’, ‘산 사람의 희생이 정당화될 만큼 사울의 신념이 대단한 건지는 모르겠다’와 같은 감상평들이 왕왕 남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도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지만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그 어떤 묘사보다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재된 내러티브를 통해서 리얼리티를 전달할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 ‘사울의 아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역사의 비극을 소재로 다룸에 있어서 새로운 실험을 한 라즐로 네메즈의 시도는, 고전적 내러티브 중심의 시대물이 범람하고 있는 현재 우리나라의 영화계가 눈 여겨 봐야 할 표현 방식일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비슷한 형식으로 다룬 거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를 ‘사울의 아들’과 비교해 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