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구좋아하는 K과장 Jan 12. 2024

아이고 우리 디렉터님~

2. 상세페이지를 만드는 데 영혼을 갈던 날들

이커머스 마케터라는 새로운 롤을 부여 받은 나에게 주어진 미션이 여러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신규로 론칭하는 테이블웨어 제품의 상세페이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간 우리 회사의 제품 상세페이지들은 해당 상품들을 내부 시스템에 등록하기 위한 누끼컷들을

이런 저런 사이즈 조합으로 배치한 이미지가 전부였으며,

상세페이지 내용 역시 공급자적 입장에서 쓰여진 소재 관련, 휴대가 용이한 사이즈,

심플한, 디자인이 어떤 정도의 세네줄의 간략한 설명이 전부였다.


이 얼마나 공급자적인 상세페이지인지... 물론 착한 우리 고객님들은 그런 상세페이지만 보고도 우리 제품을 구매해주셨다.



신규 론칭 제품과 나는 아무 연관이 없었다. 신규 론칭 제품은 상품 기획자가 따로 있었고, 다른 유관부서에서

상품 개발을 진행해줬기 때문에 나는 정보가 전무한 수준이었다. 갑자기 상세페이지를 고도화 해야한다며,

기획자를 도와서 새로운 상세페이지를 가져오라 했을 때 그저 눈만 끔뻑일 수 있었을뿐.

그리고 나는 집에서 요리도 안해먹는 테이블웨어 저관여자 (절대 고관여자 아님)인데,

내가 어디서 무엇을 레퍼런스 삼아서 상세페이지를 만들고 촬영 의뢰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모든 촬영물들은 인쇄물을 위한 작업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이런 디지털 플랫폼에 적합한 컨텐츠를

제작하든지, 기획해보든지 한 적이 없는 스튜디오와 디자인팀에게 어떻게 가이드를 준단 말인가.


그리고 정말 솔직히 엄밀히 말하자면, 상품 기획자가 있는데 내가 하는게 맞는가....?


하지만 그 의문은 곧장 치워버려야했다. 나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완벽히 해내고 싶었고 이 상세페이지가 이 제품 론칭의 사활이 걸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 제품의 상세페이지는 그 페이지를 보고 이 제품을 내가 들었을 때, 입었을 때, 우리 집에 가져다 놨을때 등등의 모습이 소비자의 머리속에 바로 그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우리 제품이 기술력이 뛰어나고, 어떤 점이 좋고, 소재가 어떻고, 고급 원료를 사용했고 등의 미사여구보다 일단 내가 샀을때, 내가 쓸 때, 내가 입었을 때, 소위 말하는 '있어biltiy'가 있느냐, 그리고 그 모습을 바로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신규 테이블웨어 제품의 상세페이지 제작의 방향성도 우리 집에 뒀을 때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면서, 내가 집에서 식탁에서만 쓰는게 아니라 침대 곁 미니 테이블, 업무용 책상 등에서 쓰는 모습들도 보여주는 쪽으로 잡았다.

우선 최대한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상세페이지들을 여러 사이트들을 통해서 찾고, 무드가 비슷한 컷들끼리 모아서 정리했다.

그리고 상품의 기획 포인트나 USP (user selling point, 즉 소구 포인트, 소위 팔릴만한 요소들)는 상품 기획자 분에게 제품 개발을 맡아주신 분과 함께 내용을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모은 정보들을 하나로 합치고, 우선 필요한 모든 연출컷들을 확보하기 위해 디자이너와 미팅을 했다.

우리가 원하는 이 제품을 보여주는 방식은 이러하고, 우리 집에 이 테이블웨어를 놓았을 때, 근사한 브런치씬, 우리 브랜드가 주는 경험을 그대로 집으로 옮겨둔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작업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디자이너도 이 작업을 흥미롭게 여겨서 굉장히 근사하고 디테일한 촬영 시안이 나왔고, 무려 이틀에 거쳐서 촬영을 했지만 매우 훌륭한 아웃풋의 이미지들이 나왔다.


이제 내가 할일은 상품 기획자가 준 USP들을 좀 더 감성적인 문구로 바꾸고, 어떤 이미지와 어떻게 매칭할지, 상세페이지의 레이아웃은 어떻게 가져갈지를 정리하는 스토리보드를 작성하는 일만 남았었다.

근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신규로 출시하는 상품 SKU수는 개별 단품으로는 6종이었으나, 각종 세트 묶음들이 생기고, 우리 회사는 상세페이지를 코딩한 html url을 쓰는 것이 아닌, 개별개별의 jpg 파일로 업로드 해야해서 나는 그때 총 16개의 상세페이지 스토리보드를 작성했다. ^^; (지금은 외주사 쓴다)


촬영 의뢰부터 상세페이지 완성까지 거의 일주일 정도를 야근도 하면서 이 작업에 매달렸는데,

매일 화면에 무드보드 만들고, PPM 작성하고, SB 쓰고, 연출컷 기반으로 각 기획전 페이지나 배너 시안 작성하는 나를 보면서 팀원들은 '아이고 우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님~~'이라며 우스개 소리를 해주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이렇게 빡센 업무라면 나는 안하고 싶다. ^^


어찌저찌 고된 작업 끝에 완성한 상세페이지를 씌운 테이블웨어 제품은 론칭 10일만에 4억을 팔아치우며, 일부 품목은 바로 리오더가 들어가는 등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지금도 스테디 셀러로 꾸준히 잘 판매가 되고 있는 품목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내가 마케팅 해야 하는 품목의 촬영에 나를 갈아넣으며(?) 퀄리티 있는 촬영물들로 예쁜 상세페이지와 다양한 배너 소스들을 뽑아내고 있다. 오늘도 다음 시즌에 론칭할 상품 최종 촬영 보정본들을 팀에 공유했고, 이번에도 나의 장인정신(?)이 느껴진다는 의견을 들었다.


나를 갈아넣어야 괜찮은 퀄리티의 뭔가가 나오는 아이러니(?)라니... 이커머스 마케터는 촬영과는 헤어질 수 없는 관계인가...

작가의 이전글 네?이커머스 마케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