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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음 Oct 18. 2023

발굽

 꿈에 공책을 주웠다. 사막처럼 넓게 펼쳐진 공간에 그 애 이름이 쓰여 있는 공책이 떨어져 있었다. 사막의 밤에는 겨울바람이 불었다. 별이 참 많았다. 그 애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장례식에 갔다. 사진 속에는 모르는 얼굴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애의 모습은 아홉 살이었으니.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옛 얼굴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애는 열 살이 되던 해에 미국으로 갔다. 그때는 개인 휴대전화가 없었다. 그래서 그 애는 내 아버지에게 메일 주소를 남기고 갔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그 애의 메일 주소를 묻지 않았다.

 그 애는 공책을 들고 다녔다. 파란 커버, 그 위에 쓰인 이름의 이니셜. 무엇을 기록하는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 맞는 어느 겨울날의 저녁에 나는 문득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다 그 애를 떠올렸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메일 주소를 묻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후회가 밀려오자 마른기침 탓에 입김이 계속 났다.

 스물한 살에, 바닷가에 뜨거운 열기가 한창이던 때에 그 애 소식을 들었다. 여행지에서의 그 전화는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나는 대충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애가 서울에 왔다고, 내 이야기를 했다고, 나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고. 나는 그 전화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건 벌써 한참 지난날의 일이다.

 유서는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영어로 쓰인 메모들이 몇 남아있긴 했지만 유서의 성격은 아니었다고. 나는 그 파란색 공책에는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애의 메일 주소가 궁금했지만, 끝내 묻지는 않았다.

 별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삶에서 단 한 번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는데, 꿈에서는 그것이 경험했던 일이라는 듯 뻔뻔하게 존재했다. 사막의 밤은 너무도 추웠는데 얇은 옷차림뿐이었다. 이불을 덮고 잤어야 했다. 추위에 떨리는 손으로 겨우 공책을 주웠다. 공책은 펼쳐지지 않았다. 나는 몸을 마구 떨어대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입을 닫은 공책의 파란색 커버 위로 떨어졌다. 사막의 밤은 너무도 추웠다. 손이 떨려 공책을 펼치지 못했다. 이불을 덮고 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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