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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음 May 29. 2020

구체

 바다를 보러 갔다. 바다엔 눈이 덮여 있었다. 바다는 얼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바다엔 눈이 덮여 있었다. 어쩌면 부서지는 파도가 너무도 새하얀 바람에 눈이 덮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었건, 그 바다엔 눈이 덮여있었다. 눈 덮인 바다의 모래사장에서는 모래 대신 눈뭉치가 신발 안으로 들어왔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눈뭉치는 신발 안에 들어오면 녹아 없어질 테니. 조금씩 젖어가는 양말을 느끼며 나는 계속 그 바다 곁을 따라 걸었다. 바람이 강해지고 코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추위가 늘었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발은 점점 얼어가고 걸음은 느려졌다. 저 끝까지 걸어간다고 해도 내가 머물 만한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등 뒤의 온기만으로 만족했다. 등에 업힌 너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따뜻한 온기를 내 등에 나누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두꺼운 겨울옷도 너의 온기만은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여전히 바람은 세찼지만 맞닿은 나의 등과 너의 배는 따스했다. 설원과도 같은 그 모래사장을 걸으면서도 나는 너의 차가울 등을 걱정했다. 이만 왔던 곳으로 돌아갈까 물었지만 여전히 너는 대답 없이 저 먼 곳만을 가리켰다.


 어느덧 바람은 눈을 동원했다. 이젠 코트 사이를 비집고 눈송이가 들이닥쳤고 젖은 양말은 녹았다가 얼기를 반복했다. 발걸음은 계속해서 느려졌지만 네가 가리킨 저곳은 끊임없이 멀어졌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우리가 출발했던 그곳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눈보라가 몰아쳐 당장의 앞길조차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마치 눈 덮인 사막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사막에서는 방향이 없어 길을 잃는다는데 다행히 내 옆에서는 멈추지 않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기에 그 소리를 나침반 삼아 계속해서 앞으로 걸을 수가 있었다.


 밤이 되자 눈보라가 그치고 바닷속에서 달이 떠올랐다. 고개를 높이 들지 않아도 조금만 눈을 돌리면 일렁이는 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하얀 눈처럼 머리가 조금씩 새어 가고 걸음은 더욱 느려졌지만 여전히 저 먼 곳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풀 한 포기 없는 모래사장 어딘가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고 잔잔한 파도 소리 중에는 별들의 운행이 스며 있었다. 너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걸음에도 여전히 전해오는 너의 온기와 들려오는 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워 보냈다. 


 꼬르륵 소리를 내며 커다란 달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자 가장 크게 빛나던 별 하나가 수면 위로 빠르게 추락했다. 그것이 내뿜는 빛이 너무 밝아 밤은 어느새 낮보다 눈부시게 되었고 사방은 먹먹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빛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겨우 얼굴을 감쌌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눈을 들어 비로소 저 먼 곳이었던 그 끝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는 굽어진 허리 덕에 땅과 가까워졌고 손의 주름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마침내 다다른 그곳 그 끝에는, 그 마지막에는 네가 있었다. 사방이 새하얗고 고요해 이젠 방향마저 잃어버린 내게 너는 이곳이 끝이라 말하며 비로소 내 등에서 내려와 땅을 밟았다. 이젠 허리가 굽고 무릎이 닳아 너를 올려 봐야만 하는 내게 너는 몸을 굽혀 눈을 맞추고 나를 안아 주었다. 나는 온몸으로 너의 온기를 느꼈다. 내 몸의 모든 구석에 네 온도가 가득했다. 흐르는 눈물은 오래지 않아 땅으로 떨어졌다. 눈물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내 작은 체구만한 웅덩이로 고였다. 너는 말없이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마르지 않고 바다까지 흐를 것 같았던 눈물은 어느새 그치고 내 작은 몸은 네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만 계속해서 걸어와 도달한 그 세상의 끝에는 네가 있었고 너의 위로만이 가득했다. 그 세상의 끝에서, 어느새 고여버린 눈물의 웅덩이 위에서 나는 네 품 안에 스며들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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