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그랬듯, 내 여행기는 썩 맛깔스러운 글은 아니다. 메모성 글에 더 가깝다는 것을 다시 한번 고지드린다. 이 글의 사진들은 직접 촬영했다.)
여행기는 단상이 완전히 잊히기 전에 후루룩 쓰는 게 제맛이다. 더 제격인 표현을 고르다 날것의 감정이 날아갈까 봐 그렇다. 사실 이번 여행은 예민함이 극에 달했을 때 떠났던 여행이었다. 간신히 되찾은 여유로운 감각을, 향후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싶진 않다. 어젯밤 돌아와 대충 사진 정리를 하고 몇 자 끄적여본다.
Day 1. 나고야역
나고야를 선택한 데엔 큰 목적은 없었고 관광보단 유유자적한 여행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도쿄, 오사카, 사가, 후쿠오카, 구마모토, 그리고 후쿠시마까지 가본 사람으로서 한적한 풍경을 즐기는 게 나의 여행 취향에 더 맞았다.
비행기에 내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나니 밥시간이 애매해졌다. 거리를 한가롭게 걷다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아주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다 보니 한국 사람도 적었다. 컵라면과 샐러드로 끼니를 간단히 때우고 나고야성으로 향했다. 맙소사, 미처 영업시간을 체크하지 못한 우리는 나고야성 입장에 실패했다. 20여 분 차이였다. 남편과 가벼운(?) 말싸움 한바탕을 하고 나서 근처 오아시스 21이란 쇼핑몰로 향했다. 물이 흐르는 유리천장으로 유명한 타원형의 복합시설이란다. 거기서 미라이타워 야경과 해리포터&토토로샵을 구경한 뒤 파칭코에 들렀다. 뽑기로 나온 아이들이 내가 딱 원했던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그게 뽑기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100% 좋지 않아도 100% 나쁘지도 않은 것. 일본 사람들은 이렇게 하굣길과 퇴근길에 '소확행'을 챙겨가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나 싶었다.
Day 2. 시라카와고
작년에 삿포로를 가려했으나 베트남으로 선회한 뒤 일본 설경에 대한 로망은 늘 있었다. 비싼 삿포로 대신 시라카와고란 마을에 가기로 했다.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 눈을 바로 털어낼 수 있도록 집들은 합장하는 손 모양의 '갓쇼즈쿠리'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삼각지붕 위에 쌓인 눈을 보고 있으니 북유럽 동화마을에 온 느낌이었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온야도 유이노쇼 료칸에 묵으며 이 시골마을의 정취를 충분히 느끼기로 했다. 설경을 마주하며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고 온천을 하고 별을 보다가 잠들었다. 자기 직전에 87살 할머니 타라 미치코가 쓰신 '무미건조한 오트밀에 레몬식초 2큰술을 더한 하루'란 책을 읽었다. 내가 가진 조바심을 많이 내려놓고 싶었다. 할 수 있겠지.
DAY 3. 시라카와고에서 다시 사카에역으로
6시에 눈을 떠서 료칸 근처 동네 산책을 했다. 완전히 밝지 않았을 때의 이 고요한 느낌이 너무 좋다. 첫눈챌린지 릴스도 도전했다.
버스에서 정신없이 자다가 다시 나고야에 도착하니 비가 추적추적 온다. 미라이타워에 있는 신기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유명한 된장돈가스를 먹고선 첫날 미처 가지 못한 나고야성으로 향했다. (된장돈가스는 시라카와고에서 먹었던 점심 이후로 가장 맛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아스((德川家康·1543~ 1616)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성이라는데, 이에아스는 일본 역사상 파란만장한 전국 시대를 '인내'로 살아남은 리더였다. 나에게 부족한 덕목이다. 일본 사람들 사이에선 나머지 3대 무장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이에아스가 제일 인기라고 한다. 날씨가 흐리긴 했지만 성 모습은 운치가 있었다.
카페에 가고 싶지만 카페마다 다 대기줄이 늘어서 있다. 겨우 스타벅스에 자리 잡고 카페인을 수혈한 뒤 호텔로 향했다.
저녁 8시 반, 마침 아시안컵 일본 대 바레인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로컬 맥주집에 갔는데 축구를 틀어놔주지 않는다. 맥주 한잔 정도만 걸치고 나오려는데 사장님이 서비스로 샷 한잔을 주시겠단다. 손님들과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는 다른 스포츠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면서 축구를 봤다. 우리 앞엔 한 할아버지가 혼자 맥주를 여러 잔 시키면서 축구를 보고 계셨다. 골을 넣을 때마다 주변인들과 하이파이브를 하셨지만 우리에겐 권하지 않으셨다. 한국 사람인지 아셨던 모양이다.
DAY 4. 나고야역에서 다시 한국으로
미라이타워를 배경으로 성대한 조식을 먹고 오스 상점가로 향했다. 사실 오스 상점가라는 목적지보다는 가는 도중에 동네 정취를 느끼는 일이 나를 더 충만하게 한다. 앨리스 소품샵과 커피집에 이어, 근처 디즈니스토어와 포켓몬센터에도 들러서 소품들을 대거 구매했다. 나는 썩 애니메이션 덕후는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일본의 소프트파워는 단단한 내공이 있기에 오랜 시간 유지될 수 있단 생각이다. 우리나라 한류도 그래야 할 텐데.
필수코스 이치란라멘을 흡입하고 한국으로 향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쉬러 간 여행이었고, '뭘 꼭 봐야겠다'는 압박감 없었기에 재밌게 즐길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뭐가 제일 기억에 남느냐고 하면 시라카와고의 설경도 좋았지만, 아마 애니메이션 소품샵 투어라고 대답할 듯하다. 작은 것을 통해 나를 꽉 채워나가는 그 건강하고 건전한 마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