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ghtme Dec 12. 2020

진정한 친구

[경증 우울증 극복기 세 번째] 상처만 남은 고백

 전 직장에서 퍼진 소문 때문에 우울 증세가 발현됐다는 걸 알게 되고 두 번의 모임에 나갔다.

 첫 번째 만남은 전 직장 친한 언니, 동생들과 모임이었다. 다행히 모두 그 회사를 탈출한 사람들이라, 소문을 들은 사람은 없는 듯 했다.

 최근에 이직한 언니가 새 회사의 블라인드에서 공개 저격을 당했다고 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도 글을 봤을까? 저 사람이 댓글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남의 불행을 보고 이러면 안 되는데, 언니가 나와 비슷한 피해를 받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하니, 이런 불행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요즘 직장에서 업무가 많고, 중요한 일을 맡아서 압박감이 심한 게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더군다나 내 삶에 있어서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한량처럼 살고 싶은데, 맡은 일은 무조건 성공해야 하는 완벽주의도 심해서, 이상과 실제 성격이 충돌해서 심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다들 너네 회사만큼 좋은 회사가 어딨다고, 사람 때문에 힘들지 않은 게 어디냐며, 복에 겨운 고민이라고 했다. 그 누구도 내 고민을 공감해주지 않아서 집에 가는 내내 찝찝하고 유쾌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현 직장 친한 동료들과 만났다. 함께 여행도 다녀왔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한 명이 아는 언니가 사수 때문에 정신 병원을 갔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친한 동생도 정신 의학과를 다녔고, 나도 경미한 우울 증세 때문에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소문의 피해자가 된 얘기까지 울먹이며 털어놨다. 너 잘못 아니라고, 많이 힘들었겠다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한 분은 정신병원 약 안 좋으니까 괜찮아진 것 같으면 약을 끊으라고 했다. 또 다른 분은 운동하라고, 운동하면 그런 일이 더는 안 떠오른다고 했다. 그리고 친한 친구는 "네가 너무 완벽주의라서 그런 일로 힘들어하는 것 같아. 그냥 신경 쓰지 마"라고 했다.


 세 사람 모두에게 상처받았다. 위염에 걸린 사람한테는 약 먹지 말라는 얘기 안 하면서, 왜 정신의학과 약은 먹으면 안 된다는 구시대적인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운동이 정신 건강에 좋은 건 누구나 다 아는데, 해결책을 몰라서 얘기한 게 아닌데 답답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완벽주의라서 그런 거라고,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가 제일 상처였다. 내가 힘든 게 완벽주의인 내 탓이라고 책임을 지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하면 하루아침에 신경을 안 쓸 수 있을까? 누구보다 노력한 건 나인데, 노력해도 상처가 남아서 병원까지 다니는 건데, 신경쓰지 말라는 얘기가 무척이나 무심하고 성의 없게 들렸다. 사람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나는 나와 다른 감정도 인정해주는데, 어떻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지 외로웠다.

 정혜신 교수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 누군가 고민을 얘기할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충고, 조언, 평가, 판단 (충조평판)이라고 했다. 나는 울면서 힘겹게 상처를 고백했지만 돌아온 건 충조평판 뿐이었다. 가벼운 얘기만 할 때는 함께하는 게 정말 즐거웠는데, 크게 실망해서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졌다. 물론 모두 나를 위해 한 얘기인 건 알지만, 내가 상처받은 걸 어쩌겠나.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반성했다. 고민을 말하기 전까지 누구보다 해결책을 찾아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당사자 일 텐데, 나도 공감보다는 해결책을 먼저 제시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사건이 생길 때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많았기 때문에 진정한 친구가 없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깨달았다. 그리고 힘든 일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전화하고, 내 감정을 공감받으며 위안을 얻었는데 이것도 줄여야겠다. 언제나 내 감정이 옳은 건데, 남들에게 감정을 인정받고 싶었다. 자존감을 조금 더 키워서 다른 사람에게 공감받지 않아도 내 감정에 확신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한편으로는 무슨 얘기든지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를 한 명쯤은 만나고 싶어졌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같이 있으면 편하고, 나처럼 자신에 대해 관심이 많고, 미래 지향적인 그런 친구.

 나는 폐쇄적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지만, 사람을 사귀려는 노력을 해보려 한다. 의사 선생님은 의도치는 않았지만,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 덕분에 좋은 쪽으로 생각의 방향이 흘러갔다고 했다.


 얼마 전 꿈을 꿨다. 남동생이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데 엄마는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남동생이 괴롭힌다고 울면서 엄마를 흔들고 얘기하는데, 엄마는 TV만 봐서 답답하고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최근에 본가를 다녀와서 어릴 적 트라우마와 관련된 꿈을 꿨다고 생각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꿈에서 나온 사람이 아닌 꿈에서 느낀 감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일상에서 만난 사람을 꿈에서 만나는 경우는 1%에 불과하며, 일상에서의 감정을 꿈에서도 느끼는 경우는 30~50%라고 했다. 따라서 나는 엄마, 동생에 관한 트라우마보다는 고민을 털어놓고 느낀 답답함 때문에 꿈을 꿨을 가능성이 높다.

 고민을 털어놓고 더 외로워졌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용기 있게 남에게 손을 내민 내가 멋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동안 인지하지 못 했던 일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