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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Mar 07. 2019

#8. 같은 이름 다른 영업

로마에 가면 로마의 영업법을 따른다

나는 의료 기기 회사에서  70명의 고객을 담당했다. 20억 매출 목표 달성 여부가 그 70명에게 달려있었던 것이다. 고객의 풀이 정해져 있는 조건에서 마음에 안 드는 고객을 포기하고 담당 병원 밖에서 대체할만한 고객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소한 말실수로 고객의 심기를 건드려 매출 페이스가 우르르 무너지거나, 유능한 경쟁사 영업 사원 때문에 주요 고객이 경쟁 제품 사용자로 전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내 고객은 미우나 고우나 70명뿐이었다.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게 아니라 안 아픈 고객이 없던 시절 매출을 지키고, 올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던 내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고객마저도 포기할 수 없었다. 매주 그의 진료실을 두드리기 전 '난 할 수 있다'를 되뇌는 버릇이 생긴 것도, 짧지만 불편한 만남을 마치고 문을 닫을 때 '이게 사회일까? 어른이 되는 걸까? 잘 참았어. 오늘도 잘한 거야.' 스스로를 토닥이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의료 영업을 통해 점점 모든 상황을 고객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영업의 본질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약 1년 반 전 나는 취미, 여가 상품을 공급하는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했다. 회사에서는 앱 서비스에 상품을 공급할 업체/개인을 찾아 영입하는 상품 영업 매니저로 일한다. 한정된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기존 의료 영업과 달리 수많은 사람들 중 타깃을 정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상품을 소싱한다는 면에서 MD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규모가 큰 홈쇼핑이나 네이버 같은 대형 포털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서비스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하고, 입점 시 어떤 이점이 있는지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점에서 영업의 색이 짙은 직무라고 할 수 있다.

[의료 영업에서의 한정된 고객풀 vs 스타트업 앱 서비스에서의 무궁무진한 고객 풀]     출처=unsplash.com


#1. 고객에 대한 집착은 약일까?


"XX님, 그쪽 안 된다고 하면 접고 다른 데 집중하죠?"

입사 직후 팀장님이 두 번째 팀 미팅에서 꺼낸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경험이 있다.


'뭐? 저번 주에 꼭 계약해야 된다고 하더니, 벌써 포기하고 다른 데에 연락해보라고?'


의료 영업을 할 때는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안 사요! 안 사!" 소리치는 의사 선생님도 다시 찾아뵙는 것이 당연지사였는데, 고작 일주일 만에 리소스를 붓지 말고 빨리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말하는 팀장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 직장에서는 고객이 마음을 돌릴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세 덕분에 상사에게 칭찬을 받았고, 개인적으로도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면 성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동안 팀장님과 상품팀 전체 방향성에 동의하지 못해 계약건 한 개에 3~4주씩 쏟아부었다. 당연히 그 시절의 나는 서비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계약 건을 포기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성사시키지도 못하는 가운데 시간만 흘려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어리석게도 어떻게든 밀고 나가 주어진 계약건을 성사시켜서 이전 직장에서와 같은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당연히 다른 팀원들에 비해 내 상품 소싱 속도가 느려졌고, 계속되는 저조한 매출 실적이 내가 틀렸음을 보여줬다. 특정 고객에 대한 집착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출처=unsplash.com

액티비티를 제공하는 잠재 호스트는 무궁무진하다. 소셜 모임을 이끄는 개인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수 십만은 될 것이라 추정된다. 항상 인플루언서를 소싱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무슨 수가 있어도 당장 사업을 확장해야 하는 스타트업에서 한 명이 계약을 해줄 때까지 시간과 노력을 쏟을 수는 없다. 다양한 호스트와 손을 잡고 상품 수를 늘려야 한다. 대중성이 있고, 현재 유저들의 니즈를 어느 정도 반영한 상품들을 빠르게, 많이 소싱하는 것이 지금 이곳 상품팀 담당에게 필요한 역량이다.


70명의 고객으로 지지고 볶아야 하는 의료 영업에서 '끈기와 인내'가 가장 중요했다면, 현재 스타트업 상품 영업에서는 영업직 자소서 단골손님 '발 빠른 영업' 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 고객이 왕이다?


의료 영업 사원마다 본인만의 영업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의료 기기를 넘어 의학의 영역까지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와 전문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 사근사근한 성격으로 금세 고객과 친밀감을 쌓는 사람, 오랜 시간 업계에 종사해서 정확한 순간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인맥 넓고 눈치 빠른 사람 등등. 영업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이 업계에는 '언제나 고객이 우선'이라는 일종의 신념과 이를 따르는 영업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나도 그런 자세로 영업에 임했다. 영업 사원이라는 말에 바로 하대를 해버리는 고객도 있었고, 본인 기분에 따라 내게 빈정거리며 말하는 고객도 있었지만, 이 바닥은 '원래' 그런 곳이고, '당연히' 이런 상황이 용납되는 곳이라 여겼다.


그 때는 언제든 고객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요청이 오면 근무 시간 상관없이 즉각 응대했다. 아주 사소한 실수라도 크게 사과했다. 나에게 부탁할 일이 아니더라도 왜 내게 이야기하는지 되묻지 않고 들어 주었다. 고객에 대한 빠르고 정확하고, 적극적인 응대는 내 영업 스타일의 일부가 됐고, 이것이 매출을 올리는 나만의 영업 스킬이라 확신이 있었다.

스타트업 상품 영업을 시작한 후 6개월 정도는 실제로 이 영업 스킬이 잘 통했다. 예비 호스트들이 밤 11시에 굳이 그 시간에 확인하지 않아도 될 일로 전화를 해도 친절하게 대답하고, 원래 운영팀으로 요청해야 하는 상품 내용 수정을 부탁하면 길에서도 노트북을 열어가며 응대했다.

내 작은 친절 덕분에 고객들이 만족하고 플랫폼에 잘 정착하고 있다는 보람도 잠시. 거의 모든 호스트들이 일정 시간 대기해야 하는 공식 운영 센터를 이용하지 않고 내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담당하는 호스트가 100명이 되고, 300명이 넘자 내 전화는 쉴틈이 없었다. 많은 고객들이 평일/주말, 밤/낮 상관없이 당장 본인 요청을 들어줄 수 있는지 물어왔다. 처음에는 "저는 그냥 이숙정 매니저님이랑 이야기할게요."라는 말이 직원 중 내가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 같아 뿌듯했다. 그런데 그런 전화가 지나치게 많아졌고, 타 호스트와 다른 일종의 특별 응대 프로세스가 생겨 사무실 내 혼란이 잦았다. 호스트들의 수많은 문의와 요청 사항으로 도배된 개인 카톡은 더 이상 다 읽을 수조차 없었고, 점점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며 동료가 "숙정님 이제 그만"이라 충고를 건넨 적도 있다.


스스로 힘이 딸려 물리적으로 모든 내용을 응대할 수 없게 된 것은 둘째치고 내 친절이 그들을 플랫폼에 정착시키고 있다기보다 그들을 특별 대우 없이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24시간 끊이지 않던 고객 응대]     출처=unsplash.com




서비스의 가치를 전달하고, 협업 가능한 제안을 하는 것만이 상품팀 영업 사원의 역할은 아니다. 그들의 서비스 정착을 돕고 '운영'의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넘겨주는 것도 영업 사원의 일이고 능력이다. 의료 영업 경험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영업에 대한 편견 때문에 담당 고객을 영원히 끌어안고 있으면 성장에 한계가 온다. (회사가 호스트를 위한 응대와 교육 프로그램에 지속적인 투자를 한다는 조건 하에) 서비스를 통해 매출을 올리면서 프로세스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호스트까지 모두 포용할 수는 없다. 1,000명의 호스트 나아가 10,000명의 호스트를 영입하여 앱 유저들에게 다양한 상품을 공급하려면 컨베이어 벨트처럼 적절한 시점에 다음 응대 채널(운영팀)을 안내해야 한다. 영업 전략을 짜고 새로운 고객을 영입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출처=unsplash.com

되돌아보면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집착할 정도로 신경 쓰고 그들을 분석을 하는 것, 그들의 피드백에 언제든 명쾌하게 답하려고 노력한 것은 3년 전 의료 영업 사원이었던 나의 큰 강점이었다. 실제로 우리 회사에 불만이 있던 고객에게 정해진 요일, 정해진 시간마다 문지방이 닳도록 방문해서 추가 매출을 만들었다.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고객의 부탁에도 언제나 흔쾌히 YES! 를 외쳐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유는 있었다. 나는 의료기기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해서 대학 교수들과 학술적인 이야기를 할 용기가 없었고, 이 바닥에 익숙하지 않고 남들 다 있는 경쟁사 인맥 한 명이 없어 눈치 빠르게 처신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고객에 대해 집착하고 그들이 내 일의 중심이라 여기는 자세는 정답 혹은 유일한 필살기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같은 '영업'이라고 해서 매번 같은 역량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작은 서비스를 운영하는 스타트업에서는 집착보다는 더 많은 기회를 위한 추진력이, 고객 중심의 저자세보다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응대가 중요하다. 생업을 위해 몇 달, 몇 년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다른 곳에서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다면 그곳에서는 내가 갖춰야 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꽤 긴 시간을 쓰게 될 것 같다. 첫 이직을 경험한 2년 전 나와 앞으로의 나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고집스럽게 내 업무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속한 조직과 시장이 요구하는 역량에 귀 기울이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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