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이 되던 해 엄마가 떠났다. 엄마의 숨결처럼 힘겹게 삑삑 대다 멈춰버린 기계음을 기억한다. 모두가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몸에 맞는 상복이 없어 큰 고모 손을 잡고 병원 옆 아웃렛으로 갔다. 작은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는 흰색 원피스를 샀다. 예쁜 옷이 생겼다는 사실에 잠깐 기뻤다. 그만큼 철없고 어린 나이였다.
어른들은 내가 딸이기 때문에 엄마의 마지막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입관식이었다. 차디찬 스테인리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엄마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입관식을 절차대로 진행하던 사람들도 엄마에게 예의를 갖추긴 하지만 더 이상 내 엄마로, 산 사람으로는 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과정이 지금도 글로 표현할 용기가 나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서 있을 수도 주저앉아버릴 수도 버틸 수도 나갈 수도 없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슬픈 감정보다는 원피스와 입관식이 떠오른다.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 슬픈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놀란 마음이 컸고 이후 급박하게 펼쳐지는 상황과 내 삶의 변화에 적응하기 바빴다. 주어진 불행을 거절할 수는 없는 만큼 아파야 할 때 충분히 아프고 애도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적당히 흡수하고 충분하게 분출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죄책감으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엄마 없는 애'라는 친구들의 철없는 놀림이나 '불쌍해서 어쩌냐'라는 어른들의 걱정과 마주할 때마다 내게 엄마가 없다는 현실은 생생하게 다가왔다. 듣기 싫은 순간도 많았지만 그 어떤 놀림과 위로도 내가 마땅히 듣고 견뎌야 하는 말들 같았다. 엄마가 떠난 후 한동안 어두웠던 분위기가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순간순간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곧 집에 빚이 있다거나 아빠가 쓸쓸해 보인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이 불행이 모두 나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서른이 넘은 내가 되돌아보면 어이없는 망상이다. 하지만 어린 나는 "뭐지? 왜지? 왜 때문이지? 나 때문이구나"라는 회로를 열심히 만들었다. 답을 알 길이 없어 스스로에게 모든 화살을 돌려버렸다.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떤 사람도 가족 구성원이 사망하는 비극을 막을 수는 없고 누구의 탓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만약 내가 지금 엄마의 죽음이 자기 탓인 것 같다고 말하는 9살 아이를 만난다면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사주고 싶다. 눈을 지그시 마주치며 "절대 네 탓이 아니야"라고 알려주고 싶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충분히 슬퍼하고 더 이상 눈물이 안 날 때까지 울어. 그리고 결국엔 단단한 사람이 되렴"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작고 소중했던 내게 필요했던 것도 차디찬 엄마의 마지막을 바라봐야 하는 입관식이 아니라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어른들의 충분한 설명과 반복적인 위로가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