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e Jan 05. 2019

#3. 내가 의료 영업을 그만둔 이유

'괜히 나왔다.' 후회할 수 있길

입사 후 운 좋게 줄곧 배울 점이 많은 상사들과 일했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영업 사원으로서도 기술력 있는 제품을 담당했기 때문에 열심히만 하면 내 힘으로는 지금껏 만져보지 못한(어쩌면 앞으로도 한동안 만져보기 어려울) 큰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업팀에 합류한 지 딱 1년 만에 백기를 들었다. 피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고객의 절대 우위. 그 공고한 갑을 관계의 관행과 그로 인해 빚어졌던 사건들 때문이었다. 늘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 순응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는 이 상황에 적응되는 것이 두려웠다.

내 글이 밤낮없이 환자를 살리기 위해 일하는 의료진 전체를 부정적으로 비추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이야기를 해두고 싶은 부분은 있다. 그만둔 이유 중 일부는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고 납득할 수 없는 몰상식의 영역이지만, 이 외의 부분들은 나의 능력 부족으로 끝내 풀어내지 못한 숙제들이다. 또한 영업을 할 때 모든 부분이 나쁘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교수님들을 많이 뵈었고, 친절한 수술방 간호사 선생님들의 배려로 큰 실수 없이 익숙하지 않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특정 고객들 조차 어쩌면 내 그릇으로 담아낼 수 없었던 것이지 오늘도 다른 영업사원들은 나보다 잘 견디고, 잘 협업하며 큰 그릇으로 그들을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늘 의료기기 회사에서 일하던 시간을 생각하면 '잘 그만두었다'는 안도와 '왜 더 잘 해낼 수 없었을까' 하는 미묘한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든다. 물론 '잘 그만두었다'는 안도가 항상 압승이지만.


"넌 결제만 해주세요."

출처: by jarmoluk @pixabay

경기도 한 대학병원 수술방 제품 사용법 교육을 진행한 날이었다. 담당 장비와 소모품 사용법에 대한 교육을 마치고 수술방 간호사 30명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새로 담당 병원을 배정받은 내가 드디어 수술방 식구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였다. 법의 범위를 넘지 않으면서도 분위기가 좋아 함께 어우러지기 좋은 식당 한 곳을 예약했다.


그런데 당일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오늘 제품설명회 마치고 식사 30분으로 예약 완료했습니다!


"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네네!


"저희 영업 사원이랑 같이 밥 먹는 게 좀 어색할 것 같아요. 저희끼리만 먹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네! 아아 네네 그럼요. 이해합니다. 그럼 편하게 식사하실 수 있도록 제가 식사 마치실 무렵 대기하고 있을 테니 전화 한 통만 주시겠어요?


우리는 당신이 사주는 자리를 편한 회식처럼 즐길 테니 결제만 하고 가라는 뜻이었다. 당시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간호사들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이 내게는 아무렇지 않으며 실은 나도 귀찮은 접대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잘 되었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제품설명회를 마치자 간호사들은 예정된 저녁 식사 장소로 향했고, 나는 추운 날씨를 피해 멀뚱멀뚱 차 안에 앉아 있었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갑자기 뭐든 씻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마음 대신 차라도 씻겨야 할 것 같아 세차장으로 갔다. 깨끗하게 세차를 하고 나오니 10초도 안 되어 바로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억울할 것도 화날 것도 없이 들린  '결제만 하고 가라'는 말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눈물이 맺히다가 이내 줄줄 흘렀다. 병원 주변을 한 바퀴 두 바퀴 돌아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배라도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저녁 식사 장소로 예약한 건물 1층 편의점에 들어가 작은 컵라면 한 개와 샌드위치를 샀다. 그렇게 간호사들은 2층에서 소고기를 먹었고, 나는 1층에서 허기를 달랬다. 원래 컵라면을 너무 좋아해서 한 번에 두 개도 먹어 치우는 나인데도 그날은 면발이 고무줄처럼 맛이 없었다. 2시간의 대기 끝에 카드를 긁고 나오며 물음이 생겼다.


"영업 사원이니까 당연한 일들인 걸까? 내가 나약한 걸까?"



출처 KBS2 드라마 고백부부

2017년 방영된 고백 부부에서 손호준의 직업은 제약회사 개인 병원 담당 영업 사원이다. 그는 접대 자리에서 폭탄주를 말아가며 의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기본이고, 의 불륜녀까지 관리해준다. 손호준이 남편(의사)의 불륜을 감지한 사모님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장면도 나오는데, 의사는 본인의 불륜을 만회하기 위해 부인의 손을 뿌리치는 손호준을 향해 강펀치를 날린다.


폭행을 저지르고 "네가 너희 회사에서 영업 이익 1등이잖아~ 내가 많이 사주니까"라고 말하는 극 중의 의사 놈.

"저는 맞은 적이 없습니다. 넘어졌는데 앞으로 조심해야 될 것 같네요."며 방긋 웃어넘기는 제약 영업사원.

그는 접대 자리가 정리되고 나서야 본인의 처지가 '개만도 못하다'며 절규한다.


나는 저 정도의 모욕적인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다수의 고객들이 "내가 많이 사주니까 당연히 넌 내가 필요한 걸 줘야지."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몇몇은 내게 이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임팩트가 있어야 돼. 임팩트가."


이 날도 제품설명회를 마치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 접대를 했다. 함께 밥 한 끼와 술 백 잔 정도를 마시는 자리였다. 평소 점잖던 고객이 술에 취해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출처: by 3dman_eu @pixabay

"옛날에는 이런 회식자리 오면 영업 사원들이 다양한 이벤트를 했거든. 마술이라든지 뭐 막 그런 재밌는 것들 있잖아~ 그런 임팩트가 있어야 돼 임팩트가."

그는 우리가 식사만 대접하고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지 않아 속상했는지 계속해서 영업 사원들의 이벤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와 동료는 멋쩍게 쳐다보다 너스레를 떨었다.

- "그렇죠. 저희가 더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가 어떤 이벤트를 해주길 바라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뭘 원하는지 알면 다음에는 해야 될 테니까.


"이러면 너네 물건 못써~"


접대 자리에서 고객에게 대뜸 혼이 난 적도 있다. 한 교수님이 잘 먹고 잘 마시다 말고 나와 동료를 본인 테이블에 앉혔다. 혼자서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다 '요즘 영업 사원들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네 ***가 열심히 하는 거 아는데, 부족해~ 경쟁사 걔네 어떻게 하는지 알지? 이러면 너네 꺼 못써!"


제품을 사용하는데 불편함은 없는지 항상 체크하고, 중요한 행사에 지원하고, 밥을 사주고 비위까지 맞춰줬는데 혼이 나는 웃기는 상황이었다. 손을 모으고 "죄송합니다. 저희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차마 티 내지 못하는 내 마음 속에서는 어이없는 웃음이 계속 터져 나왔다. 식사 자리는 끝났고, 귀가하는 고객의 차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버거웠던 하루도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 날은 바로 집으로 가지 못했다. 꿀꿀한 마음에 한참을 걷고 있었는데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마쳤어?"

-응.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그냥 모든 게 결정된 것 같아서.


"무슨 말이야?"

-그냥 나는 오늘 행사 준비도 열심히 하고, 열심히 인사하고, 맛있는 저녁을 대접하고, 잘 웃고, 잘 들어줬는데.


"그런데?"

-이러면 너네 꺼 못쓴다고. 자기한테 더 잘해야 된다고 선생님처럼 혼을 내잖아. 난 좋은 물건을 파는데. 나쁜 물건을 돈만 보고 억지로 팔지 않는데. 저 사람이 모욕적으로 이야기하는 상황에서도 그냥 가만히 있어야 되니까.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해야 되니까. 저 사람한테 나는 그냥 그렇게 행동해도 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앞으로 내가 열심히 여기서 노력해도 이런 상황에서 똑같이 가만있어야 될 것 같아. 세상에서 내 자리가 이렇게 그냥 정해져 버렸나 봐. 오빠.


"나와."

-바깥 세상은 괜찮을까? 그냥 다 이렇게 나쁠까? 세상은 이런 곳일까? 이상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술기운이 올라온 상태에서 따뜻하고 단호한 내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니 펑펑 눈물을 쏟아졌다. 따지고 보면 욕을 먹은 날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받은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 접대 자리는 내가 고객-의료 영업사원 관계의 민낯을 제대로 마주하기에 충분했다.




모든 산업과 직무에는 제각기 고충이 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뒤로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견뎌야 하는 고충이 나와 맞으면 같이 가는 거고,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약점'이면 과감히 깨부수거나 나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후자를 택했다. 항상 우위에서 행동하고 필요한 제품을 구매하면서도 '내가 선심 썼다.' 고 말하는 사람들을 포용할 수 없었고, 이런 고민은 나로 하여금 기술력 있는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보람까지 빼앗아갔다.


의료 업계 갑을 관계는 참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내가 나열한 일들만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어딜 가나 맞추기 힘든 고객은 있기 마련인데 저 사람이 못 견딘 거지' 하고 누구든 지나쳐도 된다.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 업계에서는 경험과 급이 다른 심각한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얼마 전 이슈가 된 대리수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도 결국에는 의사와 의료기기 영업사원 사이의 고착화된 갑을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참고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180907078700051?input=1195m). 공항 픽업, 가족 픽업, 개인 물품 구매, 골프 접대 등은 비교적 단순한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일부 의료진이 사적인 요구까지 들어주는 영업 사원의 약을 우선적으로 처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업계는 떠났지만 계속해서 관행으로 이어지는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들이 개선되는지 주시하려 한다.


'이렇게 빨리 개선될 거였으면 나오지 말고 버텨볼걸' 하고 후회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 카데바(시신) 워크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