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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Jan 03. 2019

#2. 카데바(시신) 워크숍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

나는 피를 아주 무서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는 단 한 가지. 명확한 목표 없이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의료 업계가 내게 손길을 내밀어줬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회사였지만 피, 수술 장면을 보는 것은 언제나 힘들었다. 제품 홍보차 참가한 외과수술 학회에서 실시간 수술 영상을 보다가 현기증이 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조금만 참으면 익숙해질 것이라 생각했고 얼른 전문성있는 영업인이 되고 싶었다.

 

의료 산업의 성장 가능성도 나의 큰 동력이었다. 의료 분야는 다른 산업에 비해 경기 영향을 훨씬 덜 받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곳이다. 2016년 국내 의료기기 시장 규모만 5조 8,733억 원이라는데 모두가 건강하면 좋겠지만 누군가는 계속 아플 테고 최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어마 무시한 장비들이 꾸준히 생산될 테니 그 시장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이 확신 덕분에 당시에는 경기가 불안정하고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와 닿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의료 시장이라는 밥상에 내 커리어라는 숟가락을 얹고 싶다'는 얄궂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꼭 붙어있고 싶은 업계였지만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 요 며칠 그 시절 내게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경우에 따라 힘들다 투덜대던 일들이 지금은 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을 소중한 추억이 되어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미화해주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강렬한 경험도 남아 있었다.

2017년 가을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기증받은 카데바(시신)를 대상으로 의대생들에게 수술법을 알려주는 워크숍이 열렸다. 나는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카데바 워크숍에 갑상선 수술 실습을 할 예정이니 회사 장비를 대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의료 업계에서 이런 요청은 영업 사원들이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기회인 경우가 많다. 평소 이야깃거리가 없어 고민하는 영업 사원이 워크숍 준비를 핑계로 고객과 자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부적인 사항들을 논의하다 보면 영업 사원과 고객 사이에 자연스러운 협력적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차 고객이 될 수 있는 의대생들에게 효과적으로 브랜드를 인지시키고, 자사 장비에 익숙해지는 기회를 만들 수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난 이 기회를 덥석 물었고, 이 선택은 스스로에게도 소중한 선물을 주었다.


워크숍 장비 대여에 대한 논의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드디어 행사 당일이 다가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날을 계기로 내게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처음 지원하는 행사라 기대와 긴장감에 새벽부터 눈이 번쩍 떠졌다. 고객이 먼저 요청한 일인 만큼 완벽하게 진행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금 일찍 도착한 워크숍 장소에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람은 없고 깔끔한 보자기가 덮인 4개의 수술대만 덩그러니 놓여 을 뿐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나는 혼자 장비 설치를 시작했다. 그런데 설치를 하다 보니 무언가 싸늘하고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서야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카데바(시신)들을 발견했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마구 올라왔다.
물론 의학 발전을 위해 시신을 기증한 분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함이 첫 번째였고, 이런 의미 있는 자리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보람이 두 번째였고, 그냥 이 상황이 내게는 무척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이 세 번째였다. 내게는 세 번째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몸이 얼어버렸다.


'3시간 동안 내가 수술대를 지나다니며 장비 세팅을 도울 수 있을까'

'내가 어색해하는 걸 아무도 몰라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정말 집에 가고 싶다'


머리가 아팠다. 어떤 냄새 때문인지 숨을 쉬기 어려웠다.

그 무렵 지원을 나온 동료들이 하나 둘 출근을 했다. 내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아 여느 때와 같이 인사를 하다 보니 다행히 조금 안정이 됐다. 동료들은 프로처럼 분주하게 장비를 켜고 선을 연결하고, 내게 오늘 실습할 갑상선 술기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저들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신 기증자에 대한 묵념 후 워크숍이 시작됐다.

4구의 시신으로 교수님들은 각기 다른 방식의 수술을 시연했다. 의대생 뿐 아니라 영업 사원들에게도 더 없이 귀한 기회임이 틀림 없었다.


 나는 워크숍 내내 장비를 케어했다. 힘들어도 밥값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 수술대 바로 옆일 지라도 침착하게 응대하고 기구를 세척했다.  중간 중간 동료들에게 오늘 워크숍은 신기하고 의미 있는 경험이라며 천직을 찾은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한 순간도 빠짐없이 심장은 팔딱거렸고 시선을 고정시키기 힘들었다. 두통도 시작됐다.


'지금 여기. 내가 있을 곳이 맞아?' 계속해서 머릿속에 이 말이 맴돌았다.


행사는 잘 마무리됐다. 빠뜨린 기구도 없었고 장비도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끈적이는 내 기분 빼고 모두 완벽한 하루였다.

맥이 빠져 집으로 가는 길. 입사 후 처음으로 내가 스스로를 너무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이 생겼다. 카데바 워크숍 자체가 퇴사를 결심한 결정적 원인은 아니지만, 스스로에게 매우 의미가 있다. 나에게 피나 피와 관련된 것들을 무서워한다는 분명한 약점이 있음에도 그저 '눈 앞에 기회를 잡기 위해서', '기회를 잡기 위해 괜찮아지기 위해서' 모든 상황에 나를 노출시키고 다그치고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계속 반복하면 익숙해지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계속해봤는데도 똑같이 불편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성장하는 산업이나 탄탄한 기업 안에 있다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괜찮은 환경에 있다고 해서 나와 안 맞는 부분이 맞춰질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 회피 혹은 지나친 기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카데바 워크숍을 계기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의료 산업에 대한 전망'이 아닌 '나'를 중심에 놓는 연습을 시작했다. 주어진 일을 하면서도 내가 너무 힘들지는 않은지, 혹시 다른 것을 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계속해서 돌아봤다.


절대 미화되지 않을 경험이라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마무리를 짓고보니 힘들었던 2017년 카데바 워크숍도 참 고마운 하루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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