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2018년 9월, 정확히 이맘때였다. 나는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출렁이는 아름다운 지중해를지척에 둔 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인내로 버텨야 하는 장장 12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니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도시,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으로 더 잘 알려진 도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일정, 비용 등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면 길 나서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여행지, 꿈의 유럽 중 한 도시다. 유럽에는 한 곳만 콕 찍어 여행하기에는 매력 넘치는 도시가 워낙 많다. 잠시 고민했다. '욕심을 한껏 부려 여러 도시를 여행할 것인가?'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한 도시에서 오래도록 진득하게 머무르기로 마음먹었다. 한 도시만을 깊고 진하게 사랑하고 싶고, 무엇보다 현지인이 되어 살아보고 싶었다.
9월의 바르셀로나는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은 늦여름 날씨다. 미세먼지 없이 화창하고 푸른 하늘, 낯선 생김새의 사람들, 고딕양식 건축물과 근사한 거리 예술가들이 내가 지내던 익숙한 일상을 떠나 낯설고 생경한 도시에 도착했음을, 이방인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생각 없이 마시고 먹고 걸으며 넋을 놓고 도시를 탐색하다 보니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대부분의 카페와 음식점에서 커피와 함께 와인과 맥주를 파는 덕분에 거의 모든 식사에 주류를 곁들였다. 파에야와 감바스를 먹고 와인과 샹그리아, 그리고 맥주를 마셨다. 30유로짜리 아트티켓을 구입해 피카소를 만나고 호안미로도 만났다. 아트티켓 한 장이면 총 여섯 곳의 바르셀로나 미술관을 볼 수 있는데, 하루 2만 보 이상씩 걸으며 다섯 곳의 미술관에 도장을 찍었다. 소극장에서 열정의 춤 플라멩코 공연을 관람하고,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건축가 가우디 투어도 했다. 100년이 넘도록 계속 짓고 있는 성당, 사그라다파밀리아를 보며 가우디 선생을 존경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여행자로서 철저하게 충실한 나날이었다.
문제는 여행한 지 8일째 불거졌다. 지난 밤 에어컨을 켜둔 채 이불을 덮지 않고 잤는지, 아니면 일주일의 강행군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호된 몸살이 걸린 것이다. 머리는 뱅글뱅글 돌고, 몸 구석구석 근육마다 아우성을 쳐댔다. 이마에서는 열이 펄펄 끓었다. 덜컥 겁이 났지만 낯선 도시에서 병원을 찾을 마음은 안 내키고, 약국을 나갈 몸 상태도 아니어서 ‘오늘은 쉬어야겠다’는 결론을 냈다. 결국 하루를 꼬박 여행지의 ‘내 집’에서 푹 쉬었다. 잠을 자다 비몽사몽 일어나 레몬으로 즙을 내 마시고 다시 잠을 자기를 반복했다.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동안 내 집은 두 곳이었다. 첫 번째 집은 람브라스 거리에서 넘어지면 바로 닿는 한인민박이고, 나흘째부터 묵은 두 번째 집은 사그라다파밀리아에서 걸어서 6분 거리였다. 몸살이 찾아온 날에는 두 번째 집이 익숙해진 후였다. 여행메이트는 길을 나선 터라 아팠던 날의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 틈에 친해진 여행지의 집이 나를 포근하고 아늑하게 품어준 것이다. 하루 푹 쉬고 나니 거짓말처럼 몸살이 달아나고 몸은 평소 컨디션을 되찾았다.
다음 날부터는 명소를 한 곳이라도 더 보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일지 않았다. 아직 이 도시에 머무를 날이 많았다. 말 그대로 빈둥빈둥 쉬엄쉬엄 살아보는 여행을 했다. 인근 마트에서 산 신선하고 재미있는 현지 식재료로 매일 아침과 늦은 밤 야식을 차려 먹었다.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는 늘 배가 부른 채였다. 아침에는 사그라다파밀리아까지 호젓한 산책을 즐기고, 거룩한 성당을 지긋이 바라보며 매일 모닝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한 도시를 여행하는 데 적당한 기간은 어느 정도일까. 2박3일? 짧아도 너무 짧다. 여기에 며칠 밤을 더한다고 그 도시를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오히려 도시는 더 생경하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텐데. 하루, 일주일, 그리고 한 달…. 시간을 물리적으로 나누어본다. 못해도 한 달은 살아봐야 어디 가서 그 도시에 대해 알은체 하고, 명함 좀 내밀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에게는 새로움을 탐닉하는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사는 일이 익숙해지고 무료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움을 찾아 여행을 한다. 여행은 미니멀라이프이고, 여행자는 미니멀리스트가 된다. 최소한의 짐만 꾸려 낯선 도시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다. 현재의 고민과 슬픔은 내가 진짜 사는 곳에 두고 왔으므로 여행지에서는 조금 가벼워져도 좋다. 매일 눈앞에 설거지 산이 쌓이지 않고, 매일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개지 않아도 되니 여행, 참 좋다. 찰리채플린은 인생을 두고 ‘멀리서 희극, 가까이서 비극’이라는 말로 우리를 위로했지만 나는 여행이 이 문장에 꼭 들어맞는 것 같다. 가까운 일상은 자주 부대끼고 복닥거리는데, 여행은 자주 웃음이 나고, 즐거워지니 말이다.
여행을 해보면 내가 평소 얼마나 넘치는 소유를 가졌는지 깨닫게 된다. 반대로 여행하는 동안 진짜 소중한 것, 익숙해진 탓에 놓쳐버린 소유의 가치를 알게 된다. 두고 온 것들 중에서 ‘진짜’는 여행지에서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배운 대로 보고 듣고 깨닫지 않아도 상관없다. 여행은 그 도시의 공기와 햇살과 바람만으로 이미 충분하니까. 어쩌면 살아보는 여행, 한 달 살기 역시 진짜를 그리워하기 위해 그렇게 오래 떠나야 하는 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