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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영 Aug 06. 2020

돈이 좋지만

곳간에서 인심난다

오래전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다. 작은 손바닥 위에 100원짜리 동전 한 닢이 놓여 있었다. 사고 싶은 거 많고, 먹고 싶은 거 많은 어린아이는 은빛 영롱한 동전을 바라보며 한참 고민에 빠졌다. 동네 구멍가게로 향할지, 문방구로 향할지 행복에 겨운 고민의 갈래길에서 잠시 망설였다. 돈, 무엇이기에 어린아이의 마음을 그토록 두근거리게 만들었을까.     


꽤 최근까지도 돈은 내게 숫자나 종이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유난히 수에 약하고 계산에 흐린 성정도 돈을 대하는 가치관을 만드는 데 기여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릴 적 읽은 찰스디킨스의 소설《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지독한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 같던, 살아오면서 만난 부자들의 모습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는 알아주는 부잣집 딸이었다. 친구 집에 갈 적마다 궁궐처럼 으리으리한 규모에 잔뜩 주눅이 들곤 했다. 학교 운동장처럼 광활한 거실에 놓인 장식장에는 유럽의 어느 골목 오래된 골동품 상점에서 사왔을 법한 시계며 작은 종, 접시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홈드레스를 입은 친구 엄마는 ‘우아함의 정석’이나 ‘부잣집 여인의 모습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재밌는 건 그 친구의 소비 태도였다. 가장 잘사는 부잣집 딸이던 그 친구가 가장 인색했다. 평범한 소시민의 딸이던 우리가 오히려 팡팡 돈을 더 잘 썼다. 친구들과 어울려 교내 매점, 학교 앞 분식집 등에서 실컷 맛있는 것을 먹고 난 후 돈을 낼 때, 그 부잣집 친구는 여지없이 딴청을 부렸다. 한두 번이야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지만, 계속 반복되면 곤란하다. 그런 모습을 자주 목격하며 차곡차곡 응어리를 마음에 담아두던 우리는 어느 날부턴가 그 친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살면서 이런 유형의 사람을 의외로 제법 만났다. 그럴 때면 삼삼오오 모여 그 사람이 없을 때 쑥덕쑥덕 ‘뒷담화’를 했다. 그러면서 인정했다. “저렇게 안 쓰니까 부자가 된 거야.”  

  

운이 없던 걸까. 그간 만나본 부자들에게서 선한 영향력을 베푸는 모습은 별로 찾아보지 못했다. 모두 스크루지 영감처럼 돈에 지독했다. ‘부자들은 왜 스크루지처럼 굴까.’ 이 사실이 내게는 참 기묘하게 느껴졌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씀씀이에 인색하고, 돈에 집착하며, 돈에 욕심을 부리는 이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그 부자들의 모습은 결코 근사하지 않고 행복해보이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그들은 내게 ‘탐욕’이라는 말과 같았다. 


그래서 돈에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돈에 집착하는 모습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함께’가 아닌 철저하게 ‘혼자’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돈은 그런 것이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그렇다고 돈과 무관하게 살지는 않았다. 나는 결코 돈을 밝히는 사람도, 돈에 인색한 사람도 아니라는 듯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며 돈을 아끼는 법을 모른 채 살아왔다. 돈에 무심한 듯 굴었지만 그 절대적인 힘과 필요성까지 모르진 않았다. 돈이 많으면 사고 싶은 것을 사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 일에 제약이 없다. 돌이켜 보면 먹고 노는 소비 활동에 게으름을 피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따뜻한 밥 한 끼,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대접하는 데도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갑자기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누군가에게 선뜻 주머니를 털어줄 수 있어야 했다. 풍족하지 않은 통장 잔고 탓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을 때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며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을 깊이 공감했다.    

 

사실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돈 쓰는 재미는 또 무엇에 비할까. 모르긴 해도 돈 싫어하는 사람 있을까. 이제는 돈에 대해 좀 솔직해져야 할 것 같다. 나도 사실 돈이 좋다고, 돈을 벌려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 일을 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나누고 베풀 줄 아는 넉넉한 인심을 실천하려면, 나와 내 가족과 가까운 이들에게 돈이 필요한 언젠가를 위해, 더 나아가 추운 겨울 차가운 방에서 지내야 하는 이웃이나 한강둔치의 어느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해결하는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면 내가 우선할 것은 돈을 소중하게 대하고 아끼는 태도일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건 돈의 가치가 아닌, 돈을 대하는 태도일지 모른다. 여전히 돈이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아니지만, 삶에 꼭 필요한 도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로또에 당첨되거나 돈벼락을 맞지 않는 이상 이번 생에는 결코 부자가 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언젠가 나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결코 인색하지 않은, 나눌 줄 알고 베풀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여유를 가진 부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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