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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씨 Dec 08. 2020

갈까 말까

나는 언제쯤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까요 6



엄마는 내가 오빠처럼 교대에 진학하길 바랐다. 엄마의 꿈은 선생님이었지만 가정 형편상 중학교도 겨우 마칠 수 있었다. 포기했던 꿈은 결혼을 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인 시누이를 보며 되살아났다. 그렇다 해도 서른이 넘은 아줌마가 공부를 다시 할 여건은 아니었고 삼 남매 중 하나라도 선생으로 키우겠단 꿈으로 대체되었다. 95학번인 오빠는 세 군데의 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다. 뚜렷한 꿈도 직업에 대한 로망도 없었던 오빠는 엄마의 소원을 들어드렸다. 교대에 합격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오빠는 좋은 선생님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던 나는 활동성을 가진 직업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경찰, 범죄심리학자, 기자, 파일럿, 탐정(?), 외교활동가 등 하고 싶은 일들은 많았으나 뭐 하나 제대로 도전해 보진 못했다. 어쩌면 자신의 능력 없음을 핑계로 실패의 두려움을 숨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방 사립대 출신이 거대 언론사에 취직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지레 포기하고 공무원 공부를 하기도 했다. 동기나 선후배들은 스펙을 쌓아 방송국이며 신문사에 척척 붙었다. 부러움보다 부끄러움이 컸다. 후회가 밀려왔다. 도전조차 해보지 않고 포기했던 시간에.



인생을 살며 우리는 매 순간 결정을 해야 한다. 점심을 뭐로 먹을까, 지금 씻을까 자기 전에 씻을까, 친구를 만날까 집에서 쉴까, 영화를 볼까? 만화책을 읽을까, 먼저 사과할까 기다릴까, 선빵을 날릴까 무시할까, 이 남자랑 살아야 할까, 아이들을 혼내야 할까 달래야 할까, 쓸 게 없어도 노트북 앞에 앉아야 할까, 사랑한다고 말할까, 못하겠다고 손 내밀까, 계속 노란불이다.

빨간 불엔 멈추고, 초록 불엔 달리면 된다. 생각해보면 명확한 규칙을 따르면 되는 운전은 인생보다 훨씬 쉽다. 내 앞을 가로막는 차나 사람이 보이면 멈추고 양보하면 사고가 나지 않는다. 깜빡이를 켜서 내 움직임을 미리 알려주고 양해를 구한다. 운전대를 잡은 첫날엔 이 모든 것이 어렵긴 했다. 내일이 더 쉬울 거라는, 더 자연스러워질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노란 불이 가장 어려웠다. 멈춰야 할지 계속 가야 할지.

빨간 불과 초록 불 사이를 스치듯 지나가는 노란 불은 준비의 시간이다. 동시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신호이다. 작은 선택들이 틀리고 달랐다 한들 삶의 모양을 바꾸는 데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대학을 가고, 회사에 들어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사고, 사업을 하는 큰 결정 앞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시간은 길지 않다. 그 시간이 길어진들 선택이 늘 옳을 수야 없겠지만, 왠지 우리는 항상 종용받는 시간을 살아가는 건 아닐까.

오 남매의 첫째로 태어나 동생과 부모님을 위해 빠른 취업을 하지 않고 조금 이기적일지 몰라도 진학을 했더라면 엄마의 삶은 이렇게 고달프지 않고 더 행복했을까. 나도 쓸데없는 반항심을 버리고 엄마의 소원대로 교대로 진학해 선생님이 되었다면 경제적으로 덜 힘들고 그래서 더 행복했을까. 도전의 순간에 포기 대신 실패를 받아들일 용기를 내었다면 지금 내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내가 가보지 않은 그 길들에 대한 후회는 백 원도 되지 않는 무가치한 환상 같은 거겠지만, 부모님의 노란 불은 조금 더 길게 켜져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매일 달리는 그 길에 노란 불이 언제 켜질지 이제 나는 잘 안다. 차가 막히지 않을 때는 두 번의 사거리를 통과해도 노란 불을 만나지 않는다. 마지막 좌회전 신호는 속도에 따라 통과하기도 노란 불에 걸리기도 한다. 50km로 달려 급하게 제동하면 멈춤 없이 직장에 도착하겠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초록 불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는 순간 사고의 위험이 커질 거라는 것을 안다. 나의 목숨과 타인의 목숨이 함께 내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 노란 불을 반가워해야 한다. 내 욕심을 누르고 속도를 줄이고 한 박자 쉬어 가라고 말해준다. 어쩌면 노란 불은 선택 강요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결정 앞에 잠시 쉬어 가라는 신호가 아닐까.

갈까 말까 고민될 때는 잠깐 멈춰도 좋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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