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일이' 너에게만 일어날까
"엄마~~~아. 윤이 가방이 귀에 걸렸어. 어떡해 너무 아파요."
이 무슨 70년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전화를 받고 나서도 걱정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놀이터로 내려갔다. 나를 보고 달려오는 현의 단짝 윤의 얼굴이 못내 진지했다.
얼핏 보면 카메라 플래시를 피하는 연예인처럼 현은 가방으로 한쪽 얼굴을 가리고 도도한 자태로 서있어 보였다. 왼쪽 귀 높이에 왼손으로 작은 손가방을 들고 있던 현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퍼와 고리를 연결하는 작은 틈에 귓바퀴가 물려있었다. 억지로 집어넣기도 힘든 일이 우연찮게도 현에게 일어났다.
윤의 핸드폰을 꺼내어 주고 가방은 이따가 돌려주기로 하고 집으로 올라갔다. 집게로 틈만 벌리면 쏙 빠질 일이라고,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자신의 귀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던 현은 내 염려보다 더 큰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마스크를 잘라내고 작업에 돌입한 지 30초 만에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고, 감염의 위험으로 병원행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평소답지 않게 시종일관 온화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현을 안심시켰다. 별일 아니고 병원만 가면 금방 해결될 거라고, 우리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전화로 문의한 소아과에서는 정형외과를 권했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정형외과에서는 일단 방문을 원했다. 안타까워하는 접수처 직원은 이미 나와 한차례 통화를 한 뒤라 신속하게 진료를 잡아 주었다. 의사 선생님은 이미 부어오른 귓바퀴에 가려진 고리가 보이지 않자, 이비인후과를 갖춘 큰 병원 응급실행을 진단했다.
'드문 일이지만 큰일은 아니었다'에서 조금 큰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30분 넘게 가방을 들고 있던 왼팔에도 통증이 오기 시작한 현은 점점 더 겁에 질려갔다. 택시를 잡아타고 정형외과 선생님이 말한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택시가 과속방지턱에 걸릴 때마다 귀에는 큰 고통이 유발되었다.
응급실에서 퇴짜를 맞았다. 코로나로 호흡기 환자만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이때부터 조금 큰일에서 아주 큰일이 되어갈까 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붓기는 점점 더 심해졌고 이미 1시간이 경과하면서 어쩌면 이 도시에서 해결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피어났다.
그때 걸려온 윤의 엄마가 차라리 119 구급대에서 쉽게 해결해주지 않겠냐는 의견을 냈다. 온갖 생활민원과 응급상황을 해결해내는 구급대를 마지막 보루로 두고 다른 응급실로 향했다.
이 병원도 응급실에서 일반 환자는 받지 않지만 정형외과 외래는 가능했다. 2~3초의 고민 후일단 왔으니 다시 진단을 받아보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사실 더 이상 갈 병원도 없었고.
"상처부위에 마취를 하고 빼내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빠른 상황판단과 자신감 있는 말투에 아주 큰일이 되어가던 사고(?)는 조금 큰 일을 지나쳐 별일이 아니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미남이고 목소리도 좋았다.(그렇게 기억에 남았다)
다행히 현은 상처부위가 깊지 않아 항생제나 소염제도 필요 없었고 소독 후 거즈 부착으로 마무리되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나의 침착함을 칭찬했다. 내가 생각해도 출산 후 육아 11년 차를 맞아 가장 침착한 순간이었지 않나 싶었다.
처음 유모차에서 현이 떨어졌던 날 울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던 일이 떠올랐다. 1초의 놀람도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런 사고는 언제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니 걱정 말고 아이 상태를 말해보라고 했다. 처음엔 아빠가 맞나, 아니 사람이 맞나 의심도 했다. 둘째 건건이 냉장고 모서리를 들이받아 이마가 찢어져 7 바늘을 꿰매었을 때도 출장 중이던 남편은 "그냥 택시 타지 뭐 그런 일로 119를 부르냐"라고 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침착함이 나에게도 조금 스며들었나 보다.
현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사태(?)로 놀이터에서 놀지 못했음을 억울해했다. 한 시간 반 동안 가방을 얼굴 옆에 붙이고 공포와 불안과 고통으로 고생했던 순간은 이 소녀에게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날 피아노 학원을 갔다가 놀이터에서 2시간을 더 놀고 귀가를 했다. 그래서 나보다 멋있다 이 어린이는.